brunch

그가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by 날마다 하루살이

일 년 365일 중에 360 일은 집 앞 마트에 간다. 거짓말 보태서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다. 매장 직원들은 매일 만나는 가족과 같은 친근함을 느낀다. 계산대에서 매번 마주치는 새끼 점원부터 사장님을 비롯, 배달 기사로 일하시는 서너 분 외에 정육 코너, 야채코너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들이 다 친근하고 반갑다.


그중에는 볼 때마다 인사를 나누는 사이도 있지만 유독 표정 없이 시선을 피하는 배달 기사님이 한 분 계신다. 깡마른 체구에 좋은 일이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언제나 느릿한 몸놀림이다. 약간은 굽은 등을 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거나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모습을 본 것이 그와의 대부분의 만남이다.


부부가 마트에서 같이 일하던 배달기사님은 볼 때마다 인사를 나눈다.(지금은 아내가 그만둔 상태이다) 가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되면 마트를 그만둔 아내의 근황이나 초등학생 때부터 봤던 딸이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 소식을 전해 듣는 그야말로 '이웃'이 되었다. 하지만 이 담배 피우는 배달 기사님은 도통 여지를 주시지 않는다.


이 마트에 주로 배달 나가는 하얀색 자동차가 두 대 있다. 근처에 있는 유치원부터 초, 중,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급식 식자재를 도맡아 배달하고 있다. 그래서 아침 산책길에서 늘 길가로 내달리는 그 하얀 자동차를 만나게 된다. 5***와 9***이 두 개의 번호가 지나가면 둘 중 어느 기사님이 타고 있을까, 기사님도 날 보셨겠지? 지금은 어디로 배달 가는 중일까.. 순간 별것 아닌 생각을 하면서 걷는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산책을 하고 비슷한 시간에 루틴적으로 식자재를 배달하다 보니 거의 매일 마주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배달 중에 봤어도 오후에 내가 매장을 들를 때 만나면 하루에 두어 번 마주치는 일도 있게 되는 그런 '사이'인 것이다. 그러니 마주칠 때 반가움을 표현하지 않기도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자주 보는 사이라 해도 인사를 나누는 사이는 또 다른 급이다. 서로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인사까지의 경계로 불러들이는 것은 서로의 암묵적인 호의가 겹쳐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단계까지 아직 허락되지 않은 사이가 그 담배 피우는 배달 기사님이었다. 그런 그와 어느 날 마트 엘리베이터를 둘이서만 타게 되었다. 아는 얼굴을 앞에 두고 멀뚱하니 그냥 서있기가 더 어려운 내가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담배 많이 피우시죠.."

조금은 장난스럽게 조금은 친근하게 건넨 말에 답이 돌아왔다. 난 그냥 무뚝뚝하게 '네'라는 단답을 기대했는데

"많이 안 피워요~~"라는 억울한듯한 항변이 돌아왔다.

예상 밖의 답은 날 당황시켰다.

"매번 담배 피우는 모습 많이 봐서요~"

혹시 기분이 상했을까 살폈는데...

무표정이다. 재차 말한다.

"많이 피우는 거 아닌데..."

혹시 핀잔으로 듣진 않았는지 살짝 걱정했다. 가벼운 인사말에 너무 표정이 없어서..

'아차! 실수했나?'싶은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그 뒤로도 그 기사님은 나를 보아도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다. 난 그 기사님이 불편해할까 봐 그런 정도의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 그 기사님이 먼저 말을 거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산책을 나섰는데 산책길에 있는 어느 어린이집 앞에 낯익은 차(5***)가 서있고 그 옆에 그 기사님과 다른 분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봤다. '아, 이 어린이집도 배달하는구나..' 집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마트로 향했다. 오전 산책 중에 머릿속으로 정리한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려는데 엘리베이터 가는 길목에서 그 배달기사님을 마주쳤다. 난 평소처럼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먼저 반기는 안색이다!

'이런 일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아... 빠르시네요~"하신다.

"아.. 아까 거기서 보셨죠~~"

그 기사님이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웃으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난 신기한 기분에 왠지 모를 몽글함까지 느꼈다. 이런 일도 있구나..! 평생 먼저는 절대 말을 걸진 않을 줄 알았는데...


그래, 사람 사이에는 오고 가는 것이 있는 거야. 아무리 사소하게 마주치는 사이라도 일방적일 순 없는 것이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아버지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