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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Nov 20. 2023

아프니까 군인이다.

누구에게나 하나 있는 꿈, 너의 꿈은 뭐야?(1화)

꿈은 꾸는 게 아니고 이루는 거라고, 꿈은 꼭 이루어진다고, 난 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의 화장대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장식장 거울의 유리와 나무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20대의 젊은 군인아저씨가 긴 칼빈 소총을 옆에 세우고 서있다. 철모의 턱끈은 풀려 있다. 철모 앞을 살짝 들어 올려 품을 멋지게 잡고 있다. 이름 모를 야지에서 전우들과 함께 찍은 나의 아버지 사진이다.                                      

군인과 총을 그 사진으로 처음 보았다. 멋진 모습에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아버지는 28사단에서 근무했다. 후방에서 근무하는 게 따분해서 GOP 근무를 지원했지만, 처와 자식을 가진 사람을 최전방에 보낼 수 없다는 게 지휘관의 뜻이었다고 한다. 

그 후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서 지원하였으나, 같은 내용으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사실 아버지는 형과 누나를 낳고 입대를 해서 나이도 많았다. 

그래서 군생활 중 별명이 "늙은이"였다고 한다. 

가끔 아버지가 군생활 이야기를 해주시면 나도 모르게 내가 군인이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작은 촌동네 골목대장을 하던 나에게 동네 어른들이 이 놈은 장군감일세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군인으로 장군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군용 헬리콥터가 착륙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엄청난 굉음을 내며 착륙하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린 나이에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지 계급에 대해서는 몰랐다. 

군복을 입고 있는 그 자체로 나에겐 멋진 군인 아저씨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헬리콥터는 500MD라는 소형 헬기였다. 

헬기에서 내린 군인 아저씨는 부산과 울산을 관할하는 53 사단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에 있는 가족 사진첩에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큰 사진이 한 장 들어있다. 

아버지께서 故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신 신문에 나온 사진을 스크랩해 놓으셨다고 했다. 

가족 앨범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께서는 어려운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해 주신 분으로 군인에서 대통령이 되신 분이라고 했다. 

군인이 되면 대통령도 될 수 있고, 헬리콥터도 타고, 멋지게 살 수 있다는 성공 공식이 나에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군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의 싹이 나의 마음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부유했던 아버지 덕분으로 부산 광안리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 

1977년 당시 거실에는 소파가 있었고, 마당에는 분수가 있었다. 

연못에는 금붕어가 헤엄치고, 마당에는 각종 꽃이 자라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무렵 아버지께서는 부산에 있는 집을 정리했다.

그리고 당시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양산군이었다가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이라는 곳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이사를 했다. 

이사 한 곳은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촌동네였다. 저녁이 되면 아궁이에서 연기가 나는 초가집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초가집을 사서 양옥집을 짓고 정착했다. 

나의 유소년시절은 작은 농촌에서 봄에는 들판에서 쑥을 캐고, 여름에는 냇가에서 빨가벗고 수영하고, 가을에는 바쁜 농사일을 돕고, 겨울에는 얼음썰매 타고 감자 구워 먹는 전형적인 촌 아이로 자랐다. 

도시에서 살다 오신 어머니는 내가 촌 아이처럼 크는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동네에서 유일한 선교원에 입학을 시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산을 개간해 작은 배나무 묘목을 심어 과수원을 만드셨다. 

시간이 될 때마다 부모님 잔심부름을 하며 나도 무엇인가를 돕고 있다는 생각에 우쭐했다. 

작은 배나무 묘목이 자라는 것처럼 우리 가족의 행복도 함께 자랐다. 


부모님께서 늦게까지 일하실 때는 원두막에서 혼자 이불을 뒤덮고 무서움을 극복해야 했다.

목이 마를 때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으신 샘에서 망개잎으로 컵을 만들어 꽂아놓은 대나무관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 목을 축였다. 

배 수확 시기가 되면 부모님은 늦게까지 배를 따서 경운기에 실어 농협 직판장에 배를 파셨다.

어머니께서는 농협 직판장에 팔고 남은 배를 부산에 있는 부전시장에 내다 팔았다.

배를 팔러 가는 날이면, 아버지께서 서생역까지 배를 경운기로 실어 준다.

어머니는 배가 가득 담긴 큰 대야를 머리에 이고 잠도 덜 깬 내 손을 잡고 새벽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부산 부전시장으로 행했다.

부전시장 과일 좌판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잘 익은 신고배를 깔아놓으면 나는 모든 일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흥정을 해야 했고, 다 팔지 못한 배를 다시 대야에 넣어 머리에 이고 기차역으로 향해야 하는 힘든 과정이 있었다. 

어머니는 가지고 온 배를 남기지 않고 모두 팔고 싶었지만, 그간 고생을 헐값에 넘기는 것을 허락하지 못한 듯 보였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터라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물건을 시장에 내다 타는 것은 어머니로써는 대단히 힘드신 생활이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돈을 벌기 위한 경제 활동을 누군가는 해야 했다. 

어느 여름 태풍이 와서 배가 많이 떨어져서 수확률이 저조했다. 

농사를 잘 지어서 좋은 값에 팔아야 아이들 옷도 사주고, 먹을거리도 넉넉하게 살 수 있다. 

흉작이 된 그해 겨울은 정말 추위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연탄은 외상으로 넣어야 했고, 석유 살 돈이 없어 곤로에 불을 피우지 못해 연탄불에 식사 준비를 해야 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은 상상도 못 했다. 들판에서 놀다 보니 손등에는 때가 끼어서 갈라져 피가 날 때도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냄비에 물을 따뜻하게 끓여 손을 불러 손등의 때를 베꼈다. 


아버지는 농사에 대한 '농'자도 모르는 분이셨다. 농부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으셨다. 

배나무를 심고 7년을 기다려야 과실을 수확할 수 있다 보니 시간과의 싸움이 길어졌다. 

가진 거라곤 과수원 부지를 사면서 같이 샀던 논과 밭뿐이었다.

경제활동이 제대로 되지 않다 보니 결국에는 논과 밭을 팔았다.

그리고 긴 세월 매일 가꾸였던 과수원도 팔게 되었다.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계속 시도하셨지만, 성과는 없었다. 가진 돈만 계속 까먹고 있었다.

서서히 가세는 기울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옆집 아주머니께 자주 가셨다. 

그리고 아버지를 다툼이 있을 때 그런 말씀을 하셨다. 

“옆집에 돈을 빌리러 갔을 때 아주머니가 빌려줄 돈이 없다고 하며 뒤돌아서서 나올 때 얼마나 창피한 줄 하냐”면서 한참을 흐느끼는 모습을 보았다. 

그 후 어머니는 면소재지에서 가까운 꽃재배 농장에서 일을 하시며, 우리 3남매를 키우셨다.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중학교는 버스를 타고 20~30분가량 다녀야 했다. 

면소재지에는 초등학교 3개와 중학교 1개가 있었다.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서생면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졸업자는 서생중학교에 무조건 입학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정원이 28명인 학교를 졸업하고 3개 초등학교가 만나는 중학교를 가니 정원이 150명이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다닐 때 유행하던 르까프, 프로스펙스, 나이키 상표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나는 그런 상표가 무엇인지 어디서 사는지도 잘 몰랐다.

한 친구가 나에게 "너 사디다스 신고 있네"라며 놀렸다. 

사디다스는 아디다스의 일자줄 3개보다 하나가 더 많은 일자줄 4개의 신발을 부르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시장표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작아적던 없었는데 아이들 앞에서 작아진 내 모습이 너무 비참했다.

저녁에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도 아디다스, 르까프 신발 신고 싶다고 막 소리쳤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말에 울산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주리원 백화점 옆에 있는 르까프 대리점에서 3만 8천 원짜리 신발을 사게 되었다. 

만원이면 살 수 있는 사디다스 운동화를 3배나 비싼 가격을 주고 사야 되니 어머니는 고민을 하는 눈빛이었다. 나도 집안 형편을 알기에 더 이상 떼를 쓰지 못했다. 조용히 어머니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막내아들을 위해 큰 결심을 하신 듯 입을 굳게 다무시며 "사고 싶은 거 신어 봐라"라고 하셨다. 

멋진 신발들 사이에서 나는 가격만 보았다. 그리고 가장 싼 신발을 선택했다. 나에게 비싼 신발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놀림을 받지 않을 상표가 필요했던 것이다.

르까프 신발을 신으면서 군인이 되면 전투화만 싣고 다니니 이런 신발과 옷에 대한 상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친구들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상황들이 내가 군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 주었다. 


나의 유소년시절 불우한 가정환경이 내가 군인이 되어야 하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군인이 되면 장군도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웃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린 나를 더욱더 군인스럽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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