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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얀 Apr 26. 2024

시간도둑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매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쁘다” “시간 없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어” 이런 말들이다. 아이들이 없는 점심은 대충 먹는 날들이 많았다. 먹는 거에 시간을 뺏기지는 않았다. 하루 24시간 중에 6~7시간 정도 자는 것 같고, 눈떠서 운동 1시간, 집안일 1~2시간, 애들 식사시간 1시간, 정리까지 한다고 해도 1시간이면 나에게 남는 시간이 대략 12시간은 될 것 같다. 

그런데 하루에 남는 내 12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그나마 일을 해야 하는 날들은 일하고 이동하는 시간들로 채워지지만 나머지 날들의 내 시간을 찾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쯤 유난히도 아침이 분주했던 날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고 잠시 내 머리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핸드폰에 있는 티빙을 눌러 김수현이 나오는 ‘눈물의 여왕’으로 잠시 쉬고 하루를 시작하자며 눌렀다. 여 주인공 김지원이 너무 예쁘게 나와서 화가 날 정도였다. 

‘아무리 드라마지만 저게 말이 돼?’ 

재벌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된 김수현이 불쌍했다. 저렇게 괜찮은 사람이 왜 주눅 들어 살고 있는 것인지……. 현실이라면 불가능 할 것 같다고 투덜거리며 보았다. 김수현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과 순간순간 내가 김지원으로 빙의되며 드라마를 보았다. 김지원과 김수현의 눈빛이 드라마 눈빛이 아니라 실제로 연인 눈빛 같다는 생각도 했다. 빌런으로 나오는 박성훈은 연기를 잘한다며 칭찬을 했다가 나쁜 놈이라며 내 일도 아닌 일에 흥분도 했다. 머리를 식히자고 본 드라마에 너무 몰입을 했는지 드라마가 끝나고도 개운하지 않았다. 

그럼 다시 간단하게 다른 프로그램 하나만 더 봐야겠다며 예능에서 골라보았다. 아들이 야구를 하면서 같이 야구 보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지난주부터 2024년 시즌을 시작하는 ‘최강야구’를 눌렀다. 김성근 감독님이 젊은 선수들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민준이도 하루 배우면 좋겠다!’며 생각했다.


“공이 오면 배트를 면으로 치는 거야! 부드럽게 돌리라고!!”

김성근 감독님이 민준이에게 소리쳤다. 민준이 눈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떡해서든 원하는 배팅을 해보겠다는 표정이었다. 시선은 감독님의 손을 계속 주시하고, 감독님의 손에서 공이 떨어지는 순간 민준이의 배트도 함께 돌아갔다. 이빨을 꽉 물고 배트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부드럽게 하라고 부드럽게!!! 힘을 빼!!” 한 100번쯤 연습한 것 같은데 아직도 감독님 입에서는 ‘오케이’가 나오지 않았다. 타격 연습만 한 시간 넘게 하고 있었다. 체구도 작은 아이가 힘들다는 한 마디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언제 마지막 공일까 하는 걱정으로 바라만 보았다. 90분이 지나고 연습이 끝났다. “고생했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감독님은 사라지셨다. 민준이는 바로 털썩 앉더니 기어서 야구장을 나오고 있었다. 더그아웃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모두 젖어있고 머리와 어깨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고 있었다. 보고만 있는데도 땀 냄새가 같이 나는 것 같았다. 아직 어리지만 여러 생각이 교차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엄마인 나도 같이 훈련받고 같이 배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이 시간이 있어서 네가 만들어지는 거야! 아들 힘내자’ 

속으로 걱정과 함께 응원을 하고 있었다. 최강야구 20살 막내의 연습 영상을 보면서 우리 아들이 연습하는 장면과 모습이 교차되었다. 그 영상만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깐 드라마와 예능을 보고자 했을 뿐인데, 내가 함께 운동한 기분이 들 정도로 피곤했다. 잠시 쉬고자 선택했던 티빙에서 나오기까지는 점심이 지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지쳤으니 점심을 찾기 시작했다. 12시간 중에 이제 6시간이 남아있었다. 지금이라도 6시간을 그냥 흘려버릴 수 없다. 그리고 티빙에서 최종 나오기를 누른 순간, 그동안 나의 12시간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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