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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얀 Jun 27. 2024

같은 공간 다른 이야기

5시 50분

아직도 나의 하루가 끝이 나지 않았다.  끝이 아니라 시작 10분 전이다. 

양양에서 했던 많은 모임들을 정리하고 2년째 꾸준히 하고 있는 모임이다. 

글쓰기 모임에 가기 10분 전, 

오늘은 그나마 숙제가 없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잘하면 오늘은 치킨까지 먹으면서 즐거운 글쓰기 모임을 하게 될 것 같았다. 

도서관 앞에 현산공원에 가서 초여름의 바람을 느껴보고 산책도 하고 아무 글이나 적어보자며 길을 나섰다. 


6시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해가 한창이었다. 해가 저물면서 보이는 공원의 푸른색은 눈이 부실 정도이다. 3.1 운동 기념비를 지나서 현산공원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각자 산책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산책다운 산책을 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매일 땀 흘리며 운동하는 시간은 있지만 양양에 와서도 여유를 누리지 못함은 그냥 성격이려니 싶었다.  양양읍의 360도가 다 보이는 현산공원을 한 바퀴 돌다가 잠시 같은 공간에 멈추었다. 

"땅을 살짝살짝 밟아서 그대로 느껴보기도 할게요."

누구 하나 지나가지도 않는다. 조용함과 함께 발이 온전히 땅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푹신하다. 조용한 선생님의 말씀이 더 또렷하게 들렸다. 

"짝을 지어 한 사람씩 눈을 감고 다른 한 사람은 산책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옆에서 이름도 불러주세요. 탁동철... 동철아.... 이렇게 이름만 불러주시면 돼요."


짝이 된 내 친구와 함께 발을 맞추었다. 나는 눈을 감고 친구를 믿고 걸었다. 조금씩 걷다 보니 내 앞에 벽이 느껴진다. 무엇인가 있는데 계속 가도 괜찮다는 친구의 말에 도저히 못 가겠다며 손을 뻗었다. 거인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듯한 나무가 바로 앞에 있었다. 너를 믿을 수 없다고 앞에 나무가 있는데도 왜 앞으로 가라 하냐며 다투기도 했다.  내가 한 발자국만 더 갔다면 나를 보호하려 했을까? 내가 한 발자국을 더 가면 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결국 나는 나무를 느끼고 몸을 돌렸기에 친구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눈을 떴다고 구박하는 친구의 말에 반박했다. 눈을 감았는데도 앞에 큰 무엇인가가 확실히 보이는 것만큼 알 수 있었다.  다른 팀들은 조용히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바람으로부터 각자의 시간여행을 했다. 아기로의 시간, 자기의 이름으로의 시간, 타인의 시간으로 들어간 시간까지... 그렇게 각자의 시간여행을 잠시 했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자리를 잡은 곳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글이어도 좋았다.  지금 이곳에서 생각하는 그 어떤 이야기도 좋았다. 주제가 없어서 힘들 것만 같은 글들은 제 각각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현산공원을 걷는 동안 2년 전 콩국수집 웨이터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90 정도 되셨던 할아버지. 최고령 웨이터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짧았던 6.25 그날 새벽에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북한군이 6.24일 대기하고 있던 곳이 현산공원이었을까?' 

읍내 어디쯤에 준비를 하고 있다고 동이 트기 직전 남쪽으로 내려온 곳이 이쯤이 아닐까 싶었다.  글을 쓰기 위해 멈춘 곳에서 양양읍을 바라보니 '여기였을 것 같다'로 생각이 들었다. 양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글을 쓰던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74년 전 숨죽이고 있던 젊은 군인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현산공원에서 바라본 74년 전 6.25일로 .



1950년 6월 24일까지 현북국민학교를 다니셨던 콩국수집 할아버지가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여기(현북)에 있으니까 북쪽 상황을 몰랐지. 양양읍에서 전날부터 탱크가 다 모여서 새벽에 쳐내려 왔어" 

할아버지 이마에 주름이 함께 움직이며 그날이 생각나신 듯했다. 할아버지의 주름의 시간으로 나도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12시

양양읍성 위에 떡갈나무는 밤새 바람과 함께 울었다. 

어린 군인들의 제일 첫 임무는 원일전리와 동산리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다. 6.25일 아침 지경리까지 진출하는 것이라 밤을 새우며 그 시간을 기다렸다. 양양읍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언덕에서 마을 불빛들이 하나둘씩 꺼져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어린 군인들. 불빛이 하나 둘 사라질 때마다 자신들이 나가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두려웠을 것이다. 

떡갈나무 앞에 숨죽이고 있던 제일 어린 군인은 아무도 몰래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도망간 들 한계령이 가로막고 있었다.  어린 군인을 달래겠다며  두어 살 많은 형이 어디서 듣고 온 소식을 전했다. 남한군인들이 다 도망갔으니 걱정 말라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동이 트기 전 첫 임무가 주어졌다. 동산리까지 쉬지 않고 가야 했다.  북한의 어린 군인보다 더 어렸던 콩국수집 할아버지는 잠에서 깨기 직전이었다. 할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시는 학교로 갈 수 없음을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만을 어린 할아버지도 알 수 있었다. 





(실제 역사적 상황) : 양양의 6.25 비화 (이한길, 2009 : 양양문화원) 자료 참고 


* 6․25 발발 직전 남한의 군 작전 상황 38) 

5월-6월의 위기설이 파다한 가운데 1950년 4월 10일 육군총참모장에 재기용된 채병덕 소장은 4월에서 6월에 북한군의 동향과 국내정세를 고려하여 세 번에 걸친 경계 강화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4월 21일에 인민군과 게릴라들이 노동절을 전후하여 남침과 폭동을 기도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각 사단으로 하여금 경찰과 긴밀한 협조를 하고 관 할 지역 내의 순찰을 철저히 실시하도록 하였다. 다음으로는 5월 8일에 적이 5월 30일 선거의 혼란기를 틈타 침략과 폭동을 기도하고 있다고 판단. 6월 10일 요인교환 제의 등 강화되는 평화공세가 남침을 호도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6월 11일부터 군에 비상경계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자 6월 23일 24시 부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다. 더구나 한국군 총참모장 채병덕은 6월 10일 고위장교들의 대규모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8개 사단장 중 5명이 경질되었으며, 전방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3개 사단장이 교체되었다. 새로 임명된 사 단장들은 그 예하부대의 책임지역 내 지형과 적정 등의 상황을 충분 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간 45일이나 지속되던 오랫동안의 경계태세가 해제되자 다음날인 24일(토요일)에는 부대가 외출외박을 실시했고, 또 농번기에 즈음한 휴가도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⅓에 해당하는 병력이 주말에 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 6․25 직전 북한군 상황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40분경부터 적 토치카에 대한 사격을 실 시한 후에 여단 예하부대들이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적은 방어에 유 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아침 10시 무렵 주공 방 면(해안 방면)에서 여단 예하부대들이 3㎞내지 5㎞를 진격하여 시변리(현남면)를 점령하였다.

6월 26일 아침부터 여단 제2제대가 동해연안에서 전투에 투입됨으 로써 오전 10시 무렵 동덕리에서의 적 저항이 제압되었고, 여단 예하 부대들은 연곡천 남쪽천변으로 진출하였다. 1950년 7월 2일에는 삼척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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