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지만 그들은 언제나 혼자였다."
나는 혼자인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 외로웠던 시간을 오래 지냈기에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혼자라는 사람들이 왜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함께 있는지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연말에 가족들과 함께 보기를 강강추하는 영화! 이제 나 홀로 집에, 러브 액추얼리는 그만 봐야지.
1797년에 개교해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바튼 아카데미.
상위층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 기숙 고등학교다.
1970년 2주간의 겨울방학을 맞아 모두 떠난 학교에 자의로, 타의로 세 사람만이 학교에 남는다.
외롭고 상처 많은 인물들의 내면이 따뜻한 크리스마스와 대비된다.
폴 선생님은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알코올 중독 아빠를 떠나 장학금을 받고, 15살에 바튼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공부에만 매진하고 가족의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며 자란 탓일까 학생들도, 동료 교사들도 모두 폴을 싫어한다.
나에게 세상은 가혹하고
알 수 없는 곳이야.
세상도 날 그렇게 느끼겠지.
사고뭉치 털리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재혼해서 신혼여행 간다고 털리를 학교에 내버려 두었다.
아빠는... (스포방지) ㅠㅠ
다들 널 원하지 않아.
메리는 남편을 일찍 잃고 아들의 교육을 위해 바튼 아카데미에서 일했다. 잘 자란 아들은 바튼에 입학해 공부했지만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가족이라는 안전망의 부재로 깊은 고독과 결핍을 가진 인물들. 외로움과 슬픔, 우울함과 무력감을 가지고 일상을 사는 그들과 우리가 과연 다를까?
그렇다고 외로움이 타파의 대상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의 이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건 이상하거나
슬픈 일이 아니에요.
단순하지 않고
흥미로운 사람이라는
신호예요.
알랭 드 보통,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영화 후반부에 세 사람은 레스토랑에서 체리쥬빌레라는 디저트를 주문한다. (베스킨라빈스 아니다.)
"플랑베"란 요리에 술을 끼얹고 불을 붙여 향이 배게 하는 요리법이다. 아이스크림으로 불쇼하는 디저트인 것.
하지만 미성년자가 있다는 이유로 주문을 거절당하고 아이스크림, 체리만 포장해 나온다. 주차장에서 폴 선생님이 즐겨 마시는 짐빔(위스키)을 끼얹어 퐈이어~ 세 사람만의 특별한 야매 체리쥬빌레를 만든다.
명장면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이 만나 의외의 조합으로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며, 맛과 향과 온기를 함께 나눈 파이어쇼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나가 될 이유나 계획은 없지만
(= 혈연으로 맺은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하나가 되는 관계
(= 서로의 부족한 점을 감싸 안고
채워주는 가족 못지않은 사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 같다.
어쩌면 이 영화는 세 사람이 가족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가족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레스토랑 옆 테이블 위에서 타오르던 우아한 불쇼와 너무 달랐지만 그들이 만든 야매 불덩이는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 뜨겁게 활활 타올랐다. 그 자신들을 충분히 밝히고 덮어줄 만큼.
영화에 등장하는 명언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자신만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시세로
이들은 어떻게 2주 만에 깊은 유대감을 나눌 수 있었을까?
앙트레 누는 "우리끼리 얘기지만" "우리끼리만의 이야기"라는 프랑스어로 비밀을 뜻한다. 폴 선생님이 자주 내뱉은 단어이기도 하다.
폴과 털리는 서로 닮았다. 똑똑하고, 괴팍하고, 외롭고, 솔직하다.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아픈 자아를 바라보았다. 이해와 존중의 빛을 비춰주었다. 친절이라는 정석이 아닌 둘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 또한 시간을 들여 누군가를 들여다볼 기회와 인내와 사랑이 있다면 서로의 공통점과 비밀을 기둥 삼아 관계를 튼튼히 세울 수 있겠다 싶다.
털리와 메리도 비밀 같은 깊은 슬픔을 서로 이해한다. 채플에 걸린 메리의 죽은 아들 커티스의 사진 앞에서 털리는 밤을 지새운다. 그 뒷모습을 메리가 발견했을 때 어땠을까. 엄마인 나 외에도 내 아들을 기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말로 못 할 크나큰 위로였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만찬을 차려낸 메리. 털리는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이런 음식을 먹으며 성탄절을 보낸 건 처음이라며 메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비밀은 경계를 허물고 친밀함을 견고하게 한다. 결함이라 할 수 있는 서로의 비밀까지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스토리를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참으로 따뜻하게 연출했다.
서로의 텅 빈 구멍을 그저 함께 함으로 자연스럽게 채우는 이야기들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결말은 새드? 해피?
둘 다라고 할 수 있겠다.
폴 선생님은 털리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학교에서 쫓겨난다. 계획도, 거처도 없이.
새드하다...
짐을 싸는 폴에게 메리는 선물을 건넨다. 빨간 리본을 단 빈 노트를. 책장을 차르르 넘기며 "이걸 어떻게 다 채우죠?" 묻는 폴에게 메리는 말한다. "당신은 그게 문제예요. 한 글자씩 채워 넣어요." 메리는 폴에게 살아갈 이유와 꿈을 일깨운다.
원제인 The holdovers 잔류자들에서 폴은 홀로 떠나는 자가 되었다. 바튼 없이는 못 살 것 같다던 폴이 그제야 고등학교를 벗어난 셈이다. 아늑하고 안전하기만 한 좁은 연구실을 떠나 오랜 꿈인 소논문을 쓰기 위해 어른의 세계로 나아가는 장면은 내게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털리는 바튼 아카데미 학생으로 남을 테다. 2주 전과는 전혀 다른 학생으로 말이다.
아빠 같은 인생을 살까 봐 두려워하던 털리에게 폴 선생님은 "넌 아빠와 달라. 절대 아빠처럼 되지 않아. 너는 독립적인 주체야. 너는 똑똑해. 아직 어리니 이제 시작하면 돼." 용기를 북돋웠다.
털리는 자신을 믿어주는 스승을 둔 제자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최선을 다할 진짜 학생이 되었다.
역사는 그저 과거사를
배우는 게 아니고
현재의 답을 찾는 공부야.
스승의 가르침을 전수한 털리. 그의 미래가 어떠할지에 대한 결말은 관객의 즐거운 몫으로 남았다.
메리는 조카가 태어남으로 희망을 얻는다. 우울과 무력감에 빠져있던 그녀는 조카의 대학 등록금을 보태야 한다며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희망이었다.
영화 초반에 알았다.
아, 이런 게 인생 영화구나!
영화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이야기가 지나가는 게 아까워 장면들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다. 몇 번을 울었지만 어느 장면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완전히 영화에 푹 빠졌다.
2주 만에 그들은 크게 달라졌다.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려는 의도는 일절 없었다. 자신이 성장해야겠다는 의지도 전혀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각자의 공간에 진정한 관심으로 들어갔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누는 대화와 질문이었다. 셋 다 꽤나 수다쟁이들이다.
혀를 조심하고 말을 아끼라는 격언들을 비켜서 오늘은 나도 집에서 재잘거리고 싶어진다.
감독은 "1970년대 당시에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정말로 1970년대에 상영한 영화 같았다. 영화의 색감과 음향, 폰트와 형식, 지나가는 자동차의 낡은 느낌까지 체크했던 디테일한 연출이 놀랍다.
"관객이 살아있는 시대와 공간이라고 느끼길 바랐다"는 감독의 말에 혼신을 다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이 영화가 단지 텍스트 같은 2차원의 이야기로 기록되는 게 아니라, 생동하는 3차원의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속에서 살아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감독과 배우들이 그 목표를 이뤘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인생 영화가 되었다.
당신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