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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퀸 Nov 23. 2023

01 “10년 걸릴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긴 시간 걸릴 줄 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을 꿈이 시작되었다.

"지니퀸 님, 자기소개 해보세요."

"인디언 기우제를 아십니까?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반드시 내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내 면접 답변이었다. 나는 내가 말한 대로 내 꿈을 이룰 때까지 도전, 탈락, 도전, 탈락을 수년간 해왔다. 언제까지? 될 때까지.





"꿈이 뭐야?"

"승무원이요!"

내가 승무원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날부터, 나는 학교에서 나눠주는 종이 한 장의 장래 희망란에 "스튜어디스"를 자신 있게 적었다.


초등학교 5~6학년쯤,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다. 아시아나항공을 탔었고, 예쁘게 서비스하는 승무원을 내 눈으로 처음 봤다. "우와~ 나도 저거 할 거야." 모두가 한 번쯤 꿈꿨을 승무원의 꿈을, 나도 이런 평범한 계기로 꿈꾸게 되었다. 단순히 '멋있어 보여서'

어릴 적 그 소녀는 몰랐다. 그 소녀가 그렇게 쏘아 올린 꿈이 '10년, 그러니까 87,600시간'이 걸릴 줄은.

그 시간 동안 내가 본 것들은 "불합격입니다." "탈락입니다." "죄송합니다."

처음엔 '그래, 또 도전하면 되지!' 그렇게 수년간 보내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지원했을 때마저 "불합격입니다."라는 문구를 봤던 그날, 숨이 넘어갈 만큼 목 놓아 그렇게도 울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나만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그렇게 나는 점점 작아져갔고,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누구를 만나도 내 자신이 패배자 같았고, 내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했다. 항상 예민하고 내 마음과는 다르게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명절, 경조사, 모임은 반갑지 않은 이벤트들이었다.

"제발 나 뭐 하는지 묻지 말아줘."


내가 작아지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랑하는 내 동생.

지금 동생은 항공사 조종사다. 어쩌다 우리는 같은 분야의 꿈을 꾸게 되었고, 동생이 나보다 늦게 진로를 정했지만, 먼저 꿈을 이뤘다. 동생은 정말 힘들게 공부해서 조종사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 '꿈을 이뤘다.'라는 말을 글로 쓰는 게 동생에게 미안할 만큼 동생은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큰 노력이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의 동생은 힘들어 보였다. 내가 먼저 취업했더라면 동생이 부담감을 덜 느꼈을 텐데, 그 과정을 보며 나는 미안한 마음이 커졌고, 내 꿈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 다른 집의 취업 경사, 결혼 경사가 들려올 때마다 그 소식들은 휘몰아치듯 내 마음을 후벼팠다.


시간이 흘러 동생이 합격한 그날.

"드디어"

나는 일하다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동생이 내 몫까지 한 것 같아 고맙고 미안했고 장했다. 우리 집에도 좋은 날이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켠에 우리집에서 내가 제일 못났다. 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나는 어딜 가도 역시나 패배자 같았다. 가족들은 항상 나를 따뜻하게 지지해 줬고 그럴수록 나는 더 보답하고 싶었다. 나도 엄마, 아빠, 동생의 자랑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떳떳해지고 싶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이때쯤 되니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꿈이었는지 뭔지 나도 모르겠는 지경이 되었다. 그냥 어떻게 서든지 '합격'이 하고 싶었다. 정말 너무 간절했다.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돌덩어리처럼 굳어버린 이 한을 풀고 싶었다. 10년 묵은 한이 한 방에 날아갈 것 같은 그 시원함을 느끼고 싶었다. 해결책은 오로지 '합격'뿐이었다. 이것은 '오기'가 맞았다. 내 인생에서 무언가 하나 정도는 뚫어보고 싶었다. 그게 나에게는 '승무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승무원이었을 뿐이지, 내가 또 하고 싶었던 뮤지컬배우를 꿈꿨다면 그 분야로 계속해서 될 때까지 도전했을 것이다.


가끔 친구들은 지치지 않냐고 묻는다. 보는 내가 다 지친다고 했던 친구도 있었다. 나도 안다. '포기'가 가장 쉽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포기'가 가장 어려웠다. 내가 나에게 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나 예전에 승무원 준비했었어~' 말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나 안되면 할머니 될 때까지 도전할 거야. 포기는 절대 없어. 승무원 3개월만 하더라도 내가 합격해서 내가 내 발로 나올 거야'라고.


이 마음 하나로 10년이란 세월을 버텼다. 중간에 온 세계가 고통받았던 코로나가 불어닥쳤을 때도 나는 '다 지나간다'라는 마음으로 버티고 버텼다.


10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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