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대로 말하기는 어려웠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첫 한인회 모임이었다. 기네스 맥주를 파는 어느 바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테이블 세 개를 바글바글 메웠다. 일주일 만에 한국말을 듣는 게 이렇게 반가울 줄 몰랐다.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우리는 서로 몇 학년인지, 전공이 뭔지부터 공개했다. 10명이 있으면 9명은 이공계였고, 나머지 1명은 사회과학이었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희귀종이었다.
"혹시 전공이 공대라고 하셨어요?"
"아, 아니요. 전공이 페르시아어에요."
"...네?"
다음 질문을 양손에 못 꼽을 정도로 들었다.
"페르시아어... 사어(死語)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란이랑 아프가니스탄에서 현재에도 국어로 써요."
"아. 아프가니스탄......"
상당한 놀람, 그리고 무조건 잇따르는 말.
"그럼 수업 시간에 하는 게 뭐에요?"
"현대어는 이란 표준어 위주로 공부하고, 고전어는 중세 서사시를 수업해요."
진짜 신기하다는 말, 또 이어지는 질의.
"전공을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 이게 난제였다.
사실, 나는 큰 뜻이 있어서 영국에 오게 된 게 아니다. 부모님을 따라 중학교를 프랑스에서 나오고 한국 고등학교 역시 자사고로 가게 된 이후, 우리 가족은 내가 해외 명문대로 유학을 갈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정해놓았다. 어른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던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내가 정말로 한국보다 외국을 더 좋아하는지 고민 한번 안 해보고 수긍했다.
그 이상의 진로는 나에게 맡기셨다.
떼가 덜 묻은 건지, 어린 탓에 현대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잘 몰랐던 건지,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말을 정말로 믿었다. 고등학교 때 내 관심사는 세계사였고, 세계사와 관련된 전공을 찾아보니 페르시아학이 있었다. 경쟁률이 제일 적었다. 그래서 지원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오게 된 계기는, 다른 대학들은 모조리 떨어진 게 전부였다.
한인회의 초면 인연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다.
"페르시아어 시가 좋아서요. 그런데 국내에서 중세 이슬람 문학을 배우기가 어렵거든요."
그리고 모두 신기하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런즉 내가 페르시아어를 하게 된 것은 시와 문학이 아름다워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중세 페르시아의 문학이 아름답다는 것도, 또 그것을 한국에서 배우기 어렵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떨결에 지원한 전공이었다. 이 꼬불꼬불한 문자로 적힌 글 중 어느 것이 처음으로 내 심금을 울렸는지 모르겠다. 1300년대 초반, 아미르 호스로우라는 시인의 다음 구절이었을까.
네 얼굴을 한번 보고 나면
거룩한 신상(神像)들이 조잡했고
아무리 시(詩)를 쓰려 해도
너는 시구보다 아름다웠다.
나도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아니면 그 비유들이었을까.
나방은 촛불을 짝사랑한다고 시인들은 말한다. 그래서 자기가 타죽을 줄 알면서도 촛불로 뛰어드는 것이다. 죽기 직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한번만이라도 품어보고 싶어서. 그 이후 전등을 들이박는 곤충을 다르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200년대의 시인 사으디는 다르게 말한다. 나방은 양초를 사랑한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양초의 사랑이 더욱 애틋하다고.
촛불은 나방에게 고백한다. 그도 한때 밀랍이던 시절, 그를 사랑해주는 꿀벌이 있었다고. 벌집에서 뜯겨나가 양초로 바뀌면서, 그 꿀벌과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고. 이제 그는 가만히 서 있으면서 속을 불로 태우고, 끝내 녹아내릴 때까지 눈물만 흘린다고. 나방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짝사랑보다 이게 더 아름다운 법이라고.
그리고 어느새 나는 정말로 페르시아어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건의 순서가 틀렸을 뿐, 한인회에서 했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학문은 인연 같은 게 아닐까? 애시당초 친해지고 싶어서 의도를 가지고 만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인연처럼. 하지만 알면 알수록 정이 생기고, 결국은 서로를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인 나와 이 언어도 마찬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