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라이스(Peter Rice) - 1

건축수업. 제 13강 건축구조

by 언덕 위의 건축가

한 남자가 와이어에 매달려서 웃고 있다.

더블린 출신의 그는 57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죽었다.

1992년이었다.









라빌레트 공원(Parc de Lavillette)

벌써 열흘이 되도록 파리의 하늘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창밖을 내다보아봤자 아파트의 중정만 보이는 집에 있는다고 회색의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라빌레트 공원(Parc de Lavillette)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 유명한 베르나르 츄미(Bernard Tschumi)가 설계한 해체주의 건축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츄미는 '폴리(folie)'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렘 콜하스의 안을 제치고 당선됐다.

공원에는 국중박 현상공모에서 박승홍의 안과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경쟁했던 포잠박(Christian de Portzamparc)이 설계한 작품 '음악도시'도 있다. 겸사겸사 그 건물도 보고 싶었다.

라빌레트 공원. 겨울에는 이런 느낌이 아니다.
츄미의 폴리(Folie)들

춥고 우중충한 겨울의 평일 낮, 공원에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유일하게 실내로 들어갈 수 있는 과학산업관과 아이맥스 영화관인 라 제오드(La Géode) 중에서 영화관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아이맥스 영화관이 한국에는 없었던 시절인 데다 마침 상영하는 영화가 생 텍쥐베리의 '야간비행'이었다.

돔 천장이 모두 스크린인 상영관 안에는 두세 무리의 관객만이 있었다.

소년시절 읽었던 생 텍쥐베리의 소설 중에 '인간의 대지'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야간비행'이었다.

글자로 읽을 때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대서양 위 밤하늘을 홀로 날아서 건너가는 우주적인 고독이 돔 천장을 가득 채웠다.

장엄하고도 장엄한 고독이었다.

눈 아래는 죽음처럼 검은 바다, 그 위에는 모두 별.

대단한 경험이었다.


기절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오면 과학산업관과 마주치게 된다.

몇 해 전 죽은 한 남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과학산업관에서 내다본 영화관


학기 첫 수업.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나는 교실의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면서 세 가지 질문을 한다.

누구를 좋아하는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


그 질문과 대답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건축입문. 제1강 오리엔테이션'에 썼다. (아직 각색이 되지 않아 브런치에 게재하진 못했다)

그다음 공평하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얘기한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iser)와 피터 라이스(Peter Rice) 그리고 차운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밖에 몇 명 더 있지만, 이 세 사람이 상징하는 것이 특별해서 굳이 세 사람만 특정한다.

코르뷔지에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도 한 데다가, 이후 내 강의에 자주 등장할 것이며 내가 쓴 '아, 모더니즘'이라는 글에도 소개될 것이고, 차운기 역시 비슷한 이유로 생략하고 피터 라이스에 대해 '간략하게' 들려준다.

내가 학생들이 '저는 아무개를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왜 좋아하는지'를 물었기 때문에 공평하게 나도 이유를 말해줘야 한다.


건축가 열명에게 피터 라이스를 아느냐고 물으면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두 명이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건축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산업관(Cité des Sciences et de l'Industrie)

1986년 프랑스 정부가 거대한 돼지도축장을 과학관으로 변경하는 디자인을 공모했을 때, 아드리앙 팽실베르(Adrien Fainsilber)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도축장의 철골구조는 그대로 두고 세 개의 투명한 유리 큐브를 그 골조에 붙이는 것이었다. 유리로만 이루어진 큐브의 높이는 40미터가 넘었다.

이런 건축기술은 역사상 처음의 것이었다.


그 과감하고 명쾌한 아이디어를 당선시킨 발주처는 그에게 설계를 진행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그의 디자인처럼 명쾌했다.

"이 유리큐브를 실현시킬 방법은 모릅니다."

아마도 한국이었으면 그 불쌍한 무명건축가를 바로 당선무효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걱정하지 말게. 피터 라이스라면 해결해 줄 걸세."

그리고 원수 같은 영국에 전화해서 더블린 출신의 그 남자를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프랑스인들의 톨레랑스는 이처럼 역사적 순간에 폭죽처럼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퐁피두 센터

1971년 파리의 사창가였던 보브로 지역을 철거하고 그곳에 국립현대미술관을 짓고자 현상설계를 실시한 결과, 당선작에 뽑혔노라고 나타난 건축가는 30대 중반의 두 젊은이였다.

한 명은 영국의 리처드 로저스, 다른 한 명은 이탈리아의 렌조 피아노였다.

게다가 이들이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여러분이 칭찬해 주시는 저희의 아이디어, 즉 기둥 두 개로만 이 넓은 건물의 폭을 지탱하는 것에 대한 기술적인 방법은 모릅니다."

결국 서른여섯 살의 피터 라이스가 불려 와서 해결해 주고 간다.

왼쪽부터, 렌조 피아노, 로저스의 처, 리처드 로저스, 한 사람 건너 피터 라이스

그가 이런 마술사 같은 해결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1957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건립위원회는 어이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다.

현상설계의 심사 당일 나타나지도 않았던 심사위원장 에로 샤리넨이, 이튿날 나타나서 전날 심사위원들이 추려놓은 당선 후보작들을 모두 무시하고 박박 우겨서 뽑아놓은, 그레고리 팩 닮아서 허우대만 멀쩡한 30대의 무명건축가 외른 웃존(Jørn Utzon)이 하는 말 때문이었다.

"기술적인 해결책은.... 생각 안 해봤는데요."

조개껍데기를 포개놓은 것 같은 그의 디자인은 당시의 기술로는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이 베테랑 엔지니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어쩔 수 없이 영국의 유명한 엔지니어링 회사 '오브 애럽(Ove Arup)'에 용역을 맡겼더니, 회사에서 전문가라고 보내온 것이 겨우 22살짜리 신입사원이었다.

이름은 피터 라이스라고 했다.

쉘구조를 설명하는 피터 라이스(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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