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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하 May 14. 2024

나의 이혼에 관한 사회경제학적 분석

내가 이혼하게 된 이유는 돈의 권력 때문이다. 돈 관련된 분쟁이 있어서 이혼한 게 아니라 돈의 힘이 나의 가정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이혼한 후 만나게 된 여자들 마다 하는 첫 번째 질문은 왜 이혼했냐는 것이다. 만나기도 전에 문자로 물어보는 게 보통이다. 상황에 따라 여러 종류의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제일 성의 없는 나의 답변은, "We don't love each other any more." 간단하지만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고 많은 걸 포함하고 있는 대답이다. 아내(ex-wife)가 아이들에게 한 대답이기도 하다. 비교적 조숙한 딸아이는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다. 마치 다 이유를 안다는 듯이 아니면 이유야 어떻듯 자신이 감당해야 할 상황임을 직감한 듯 스스로 해답을 찾고 있는 듯했다. 비교적 순진한 아들은 직접적으로 내게 물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서 짧은 글을 써서 설명해 주었다. 녀석은 이해가 간다는 듯 수긍했다. He said that you guys are not compatible. 아들에게 설명한 나의 이유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오랫동안 같이 살았고 이제 너희들이 대학 갔으니 각자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정확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아들이 이해할만한 답변이었다.


그다음으로 내가 주로 하는 답변은 She thinks that I don't love her. 위의 답과 비슷한 것 같지만 좀 다르다. 미국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 emotional support이 없다는 뜻이다. 여자들이 이혼하면서 남편 탓을 할 때 쓰는 변명이기도 하다. 마치 남편은 정서적으로 아내를 지지해 주는 게 의무인 것처럼. 여성은 남성보다 좀 더 감성적이니까 남편이 여자의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는 뜻이다. 좋은 부부관계에선 당연히 서로 정서적으로 위로하고 지지하는 것이 맞다. 아내가 힘들면 공감해 주고 남편이 힘들면 아내가 위로해 주는 관계. 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을 더 사랑하거나 더 참아주거나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Reason for Analysis


이혼한 사람들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들이 있다. 난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한다.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고 인간과 결혼이라는 주제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이혼에 대해 분석하는 이유는 첫째, 이혼이 최근 내 삶에 일어난 큰 변화이기 때문이다. 원하진 않았지만 발생했고 난 어떻게든 이해하고 넘어가야 했다. 사람들이 이혼한 진짜 이유가 뭐냐고 물어볼 때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설명에 대해 대부분의 반응은 그 정도 이유로 이혼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다. 어떻게 이혼 상담 한번 안 받고 이혼을 결정하냐는 반응도 많다. 배부른 소리 한다는 반응도 있다. 난 어떻게든 빨리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납득할 만한 해답을 가지지 못해서 그런지 내 머릿속에 항상 이 질문이 맴돌고 있었다. 난 어떡하다 이혼하게 되었을까?



Male Dominance vs. Female Dominance


처음 나의 생각은 아내를 blame 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나의 심리적 문제점을 인식하고 나의 잘못을 하나둘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내용은 대부분의 이혼사연에 많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분석은 이와는 좀 다른 거시적 관점에서 경제적인 요인이 가정에 미치는 영향을 말하고자 한다. 원시시대나 농경사회에선 남성우월주의가 당연한 논리였다. 사냥을 해서 음식을 구해오거나 농사를 져서 먹고살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남성의 근육이 권위의 근간이 되었다. 원시시대에는 사냥감을 먼저 먹을 수 있는 우선권은 당연히 가장 힘이 센 남성에게 있었다. 그리고 섹스를 할 수 있는 우선권도 가장 센 놈에게 있었다. 그래서 고대사회에는 일부다처제(Polygamy)가 자연스러운 제도였다. 이런 힘의 원리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더 철저하고 가혹하게 작용한다. 농경사회에서도 아버지가 밥숟가락을 들 때까지 기다리는 문화가 생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이다. 즉 경제적 능력이 공동체의 리더와 권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누가 법을 정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이 원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Switching Roles


산업화되면서 가부장적 권위는 점점 위축되었고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이런 원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경제능력의 향상으로 남녀가 평등한 걸 넘어서 여성이 일터에서 남성보다 우월한 경우가 많아졌다. 우리 가정이 이런 경우다. 아들이 4살 딸이 3살일 때 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애들을 보기로 결정했다. 미국에 유학까지 와서 어렵게 직장 잡고 Career도 꽤 괜찮게 쌓아 놓았는데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 난 Software engineer였고 아내는 변호사였다. 내가 사는 실리콘 벨리에서는 엔지니어의 수입이 변호사보다 많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내는 보통 변호사가 아니었다. 꽤 실력 있는 소위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미래를 생각하면 내가 일을 그만두는 게 경제적으로 가정을 위해 좋은 결정이었다. 난 후회는 없었다. 아이들이 Nanny대신 아빠랑 놀게 돼서 좋아하는 모습 하나만으로도 너무 만족했다. 아내도 만족해했다. 이젠 Nanny한테 애들을 맡기고 일터로 나갈 때 부모로서 느끼는 씁쓸한 기분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됐다. 나도 애들한테 항상 미안했었는데 이젠 그 미안함을 좋은 아빠역할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전통적인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바뀐 질서는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The End of Equilibrium


이후 14년 동안 이런 질서가 잘 유지되다가 아이들이 대학을 가면서 이 질서에 문제가 생겼다. 아들이 대학을 가면서 아빠가 하던 일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엄마가 하던 역할은 그대로였다. 아내 입장에선 불만이었다. 거기다 딸아이까지 대학을 가게 되니 아빠는 아빠의 역할에서 자유로워졌고 엄마는 계속 돈 버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게 불만이 되었다. 아내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높아질수록 남편에 대한 불만도 같이 높아졌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노예들이 노예도덕을 가지게 되는 시작이 이 불만에서 시작된다는 분석을 했다. 주인에 대한 불만은 주인을 악인으로 규정하게 되고 반대로 자신은 피해받는 선인이 된다는 것이다. 복잡한 철학적 얘기를 떠나서 불만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은 상대를 왜곡해서 인식하게 만들고 자신은 오히려 과대평가하고 보호하려는 게 인간의 무의식적인 심리이다. 아내는 자신은 피해자이고 남편이 잘못됐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듯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하다.



The Dynamics of Money


여기까지는 돈의 역학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이다. 대부분의 부부는 자신이 더 고생한다고 생각해도 그냥 참고 살거나 내가 좀 더 참음으로 가정이 평안하다고 위안을 삼기도 한다. 모든 관계에 필요한 건 양보와 인내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좀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면 이런 생각은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권력이라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돈이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권력으로 인식한다. 돈 잘 버는 사위한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거나 돈 많이 버는 며느리는 제삿날 참석을 안 해도 용서가 된다. 밖에서 늦게 들어오는 남편은 돈 버느라 고생하기 때문에 괜찮고 동창회에서 늦게 들어온 돈 못 버는 아내는 왠지 죄책감이 든다. 나의 부모님은 돈 잘 버는 며느리를 둔 덕택(?)에 결혼생활 내내 며느리한테 전화 한 통 받지 못해 보셨다. 항상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네가 더 잘해." 누가 정리해 준건도 아닌데 모든 질서는 돈의 힘에 의해 정리가 된다.



Work Environment


아내는 변호사이지만 Venture Capital에서 일한다. 자본주의 논리가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환경이다. 이런 회사에서 투자성공 못하면 잘리는 건 시간문제다. 투자가가 아니더라도 일 못하면 오래 붙어있기 힘들다. 제일 중요한 건 Performance and Competence이다. 이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 오래 노출되 있다 보면 모든 생각을 같은 관점(Perspective)에서 바라보게 된다. 중요한 건 결과이지 과정이 아니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생각이 적용된다. 난 항상 아이들에게 결과 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왔지만 아이들은 이미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어느새 아빠처럼 되기보다는 엄마처럼 되길 원한다. 명문대학은 반드시 가야 하고 또 좋은 직장을 가지지 못하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고전을 읽히게 하며 인문학적으로 교육을 시켰지만 다 소용없다. 세상이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력은 가정교육의 영향력 보다 세다. 분명 오랜 기간 동안 아이들과 가정에 헌신하며 살아온 내 삶의 과정이 있었는데 아내에겐 그것에 대한 기억이 없다. 오래된 사진이나 비디오 한두 개만 돌려봐도 금방 기억할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바쁘다. 이젠 애들도 다 컸으니 아빠는 잘라도 큰 문제가 없다.


The Beauty as Power


이쁜 여자는 남자들이 자신에게 잘해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을 잘 따르고 아름다운 자신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듯 할 거라는 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구애하는 남성을 조정할 수 있다. (Manipulation) 그리고 구애하는 남자들은 자신을 낮추거나 심지어 버려가면서 까지 그 여자의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을 한다. 이를 그들은 사랑이라 부른다. 이 이쁜 여자는 남자들이 자신의 뜻대로 manipulation 당함을 인지하고 즐긴다. 이게 권력(Power)이다. 최근 본 영화 "나폴레옹"에 보면 나폴레옹 아내(Josephine)가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황제를 자신의 뜻대로 control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을 이 여자는 할 수 있다. 한 남자가 자신의 Attraction에 취해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여자는 자신의 미를 권력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황제 위에 황후가 있는 것이다. 이런 성적매력을 권력으로 사용하듯,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권력으로 사용된다. 이런 원리는 부부사이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회사에서 밑에 직원들이 다 자신에게 비위를 맞추는 사실에 취해 가정에서도 자식이나 남편이 자신의 말에 순종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기대가 작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상대가 잘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다. 인간에겐 타인을 조정하고 싶은 심리가 있고 이런 조정이 생각대로 잘 진행될 때 권력의 쾌감을 느낀다. 아내는 그 쾌감에 취해 있었고 자기 생각데로 조정되지 않은 남편에게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다.


Capable of Divorce


누구나 이혼을 생각할 때 저울질을 할 것이다. 이혼 후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그리고 그 결정은 개인의 가치관에 의해 다를 것이다. 나의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고 지금까지 사신 이유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혼할 형편이 안 되서이다. 자식들 때문에 참고 사셨고 이혼해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으셨다. 이혼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물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이혼을 선택하시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이혼 없이 별거만 10년째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먹고 살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이혼은 비교적 쉬운 결정이 된다. 난 항상 궁금했다. Bill Gates는 왜 이혼했을까? 아마존의 Jeff Bezos는 왜 굳이 이혼을 했을까? 물론 표면적 이유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잘 납득이 가질 않는다. Melinda Gates는 이혼하자마자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여자 중의 하나가 됐다. 그들은 엄청난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이혼을 선택했다. 물론 돈이 아까웠겠지만 그들은 그 돈 때문에 이혼할 수 있었다. 많은 돈은 우리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 쉽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돈은 쉽게 행복도 가져다줄 것처럼 보인다.



Time to Grow


아내는 뭔가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삶에 남편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젠 아이들이 다 커서 아빠역할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용도 폐기? 이런 이유를 알기 때문에 난 이혼을 받아들였다. 아내의 새로운 출발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누군가와 같이 산다면 그건 그 사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좋아서야 한다. 사랑까지는 아닐지라도 같이 있는 게 좋으니까 같이 사는 것이다. 난 아직도 아빠의 역할이 남아 있다. 대학을 갔다고는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린 나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조금씩 멀어지는 게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거리에 살지만 내 마음속엔 이미 아이들을 멀리 밀어낸듯하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는 않다. 그동안 내 아이들은 충분한 아빠의 사랑을 받았다. It was more than enough. 이젠 아이들이 성장하듯 나도 성장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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