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대리 이야기

내가 내려놓은 물건들

by 김동의

아내는 기저질환자이다.


IGA 신장병증이란 생소한 병명은 건강만큼은 평생 걱정 없이 살아온 배우자에게 가혹한 형벌처럼 다가왔다. 벌써 2년째 뵙는 담당 교수님은 염분 있는 음식과 소스류, 국물류 음식 섭취를 금하고 가급적 자연식을 권하셨다. 임신도 함부로 해서는 안되며 항상 감기를 조심해야 한다고도 강조하셨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만들었다며 종이와 테이프가 어지럽게 붙어있는 작품이나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그림과 함께 툭하면 감기 바이러스를 가져오는데 무슨 수로 감기를 피하라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경험상 의사 선생님은 항상 극한 상황을 가정하여 조언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먹거리에 대한 경계를 조금 늦췄을 뿐인데 반응은 바로 나타났다.


가벼운 감기로 알고 찾아간 병원에서는 '급성 신부전'이란 무서운 병명의 진단을 내리곤 당장 입원할 것을 권했다. 신장은 한 번 망가지면 회복되기 어려운 기관이라고 한다. 이런 패턴이면 투석까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함께 서 있던 진료실 바닥이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것만 같았고 6살 아들놈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첫 번째 입원으로 아내를 영영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용가능한 모든 자산을 투입해 투자가치는 전무한 단독주택을 지었다. 두 차례 입원으로 우리 부부는 소금을 무척이나 경계하며 가공식품을 피해 엄선된 식재료만 섭취하고 있다. 감기는 신장에 치명적일 수도 있기에 COVID-19 창궐 시기보다도 마스크 착용을 더 충실히 했다.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로 병세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아내가 원하는 일이면 가급적 다 해줬다.


노동자에게 일요일이란 월요 노동을 대비하여 늦잠이나 낮잠 정도는 때려줘야 제 맛이고, 경험적으로 비추어봐도 일요 외출은 아내가 잡은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체험단 활동을 통해 얻은 귀중한 찬스로 느지막하게 먹거리를 해결하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느닷없이 아침부터 백화점에 가자고 했다.


아내는 물욕은 거의 없고 아름다운 배경과 함께 아이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추억할만한 사진 남기기를 즐긴다. 드물게 가는 백화점에서 뭘 꾸며놨다고 아침부터 한참을 설명했는데 어제 본 건축 유튜브 영상을 생각하느라 아내의 말들은 모두 귓바퀴를 튕겨나갔다. 못 들었지만 흔쾌히 알았다고 가자고 했다.


아내와 아이가 입은 옷을 힐끔 보고 그 톤에 맞춰 출근할 때에는 김치 국물이나 고춧가루가 튈까 봐 절대 입지 않던 에크루 데님과 쟈켓을 꺼내 입었다. 가진 옷 중에서는 매우 고가에 속하는 개체로 1900년대 초반 노동자의 워크웨어를 그대로 복원하여 그 헤리티지를 원 재료비보다 세 배쯤은 높게 붙여 판매하는 Levi's Vintage Clothing® 이란 브랜드에서 제조했다.


워크웨어를 진짜 노동자가 흔히 사서 입지 못할 정도의 높은 금액으로 책정된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아가 치밀면서도 이런 갬성을 일반 Levi's에는 절대 담지 않음으로써 나 같은 사람의 잔고를 축내는 유대계 놈들의 영악함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핏감은 서양모델과 전혀 다르지만 그만큼 아끼고 아끼는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백화점 오픈 시간 대비 오래 지나지 않아 도착한 지하주차장 입구는 비교적 한산했다. 매번 진입하려는 자와 빠져나가려는 자의 자강두천 대결로 최소 두 개 차선은 마비되기 십상인데 쾌적하게 진입하곤 더욱 쾌적한 주차 자리를 찾아 아무도 없던 지하 5층 G1 기둥 옆에 주차를 마쳤다.


매장 중간중간에 있는 공간에 시기에 맞게 옷을 바꿔입은 여러 전시물이 놓이기도 하는데, 아직 11월 초이지만 크리스마스 테마로 설치된 조형물과 소소한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와 디즈니 매장 앞에서 색 입히기 놀이를 하다가 레고 매장에 들어섰다.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사슴과 집 모형 앞에서도 행인이 등장하지 않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아 사진 촬영을 했다. 이로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사랑과 기쁨드리는 현대배콰점~♬


나를 흥분시키는 유일한 고분자 물질인 레고 매장엔 나도 혹할만한 예쁜 모델이 많았다. 미친 척하고 사볼까 했던 40만 원 상당의 캐리비안의 해적선과 챨리와 초콜릿 공장 모델을 담은 커다란 상자를 짚어보다가 집에 전시해 둘 공간이 없음을 깨닫고 내려놨다. 결코 돈 때문이 아니다.


아이가 지난 명절에 받아서 저금통에 넣어둔 현금 3만 원 한도 내에서 살만한 모델을 탐색하다가 작은 닌자고 시리즈를 구입하곤 내 신용 카드로 결제했다. 금융기관에 저당 잡힌 내 삶은 매월 필히 30만 원의 금액을 이 신용카드로 써 줘야만 가혹한 이자를 조금은 줄일 수 있다. 결제 대금은 내가 납부하는데 아이가 쥐고 있던 현금은 소리소문 없이 아내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간다.


점심시간이다. 모처럼 내돈내산 백화점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건 어떨까 싶어 가까운 매장의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외형상 그리고 느낌상 오뚜기 3분 시리즈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함박스테이크가 2만 3천 원이란다. 세 식구가 저런 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하려면 최소 7만 원을 넘게 지출해야 가능하고 식후 만족감이 돈과 비례할지도 미지수이다. 이내 식당 입장은 포기하고 아내의 h.point 앱에서 지급한 무료 음료 쿠폰을 교환하러 10층으로 떠났다. 결코 돈 때문이 아니다.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며 식품관에서 반찬거리를 사고 차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먹거리도 구입해서 집으로 조속히 귀환하자고 했다. 부쩍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외식을 했다간 혹시 모를 감염에 또 고생할까 봐 무서운 이유도 있다. 백화점 식품관은 마트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품목이나 해외 브랜드 제품이 많아 보는 눈이 즐거웠다. 그러나 이것은 염분이 많고 저것은 아질산나트륨이나 팜유가 포함되었으며 어육함량이 7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갖가지 사유로 손이 갔던 물건들을 다시 내려놓게 됐다. 화려했으나 막상 살 물건이 없는 것은 일반적인 마트나 백화점이나 매한가지였다.


내가 헝가리안 굴라쉬 수프라는 제품의 맛이 궁금해서 집어 들었으나 배우자는 군산시 이성당st로 토마토 수프를 잘해줄 테니 또다시 내려놓으라고 한다. 결코 돈 때문이 아니다. 반찬코너에서 발견한 투명 플라스틱 용기 속에 담긴 더덕구이만이 백화점 장바구니에 덩그러니 담겨있고 이것만 결재한 후 알뜰살뜰 언제 쓰이는 지도 모르는 포인트 적립과 주차확인까지 받고는 식품관을 빠져나왔다.


식품관 앞은 화려하게 전시된 먹거리들이 우리를 유혹했다. 아내는 캄차카 불곰만큼 연어를 매우 좋아한다. 연어 초밥의 가격을 봤더니 손바닥 만한 트레이에 담긴 것이 1만 9천9백 원이다. 코스트코에 가면 내 노트북 만한 용기에 담긴 노르웨이산 연어 초밥을 더 저렴한 가격으로도 구입할 수 있는데 아깝다며 내려놓았다. 이 또한 돈 때문만은 아니다. 네 개 들이 만두 한 상자랑 드물게 합리적 가격으로 보이는 모둠 롤밥도 사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입장할 때만 해도 한산했던 B5층 주차장은 방문 차량으로 꽉 찼고 몇몇 차량은 자리를 찾느라 서행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순식간에 입 속에서 사라진 만두를 되새김질하며 출차를 하는데 백화점 입장을 고대하는 차량들은 역시 두 차선을 가로막은 채 정차 중이었다.


문득 궁금했다. 대기업에서 17년을 일해온 나도 이곳에서 뭔가를 선뜻 구입하기가 망설여지는데 매일같이 '오늘 백화점 뿌실' 기세로 모여든듯한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 일지. 나처럼 이벤트성으로 한 번 와 본 이들일까? 아니면 모든 제화를 이곳에서 구입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산가들이 모여든 곳에 하필 내가 간 것일까? 대한민국 경제활동 계층 중 임금 노동자의 비율은 80%를 육박한다던데, 이들 상당수도 나와는 달리 별도로 자본소득을 발생시키는 수단을 마련해 둔 것일까?


우리 회사는 복지차원에서 직원들에게 큰 선심 쓰듯 이 백화점 이용 시 10% 할인이 가능한 카드를 발급해 준다. 단, 가전이나 가구, 식품, 명품, 임대매장에서 할인은 제한된다. 사실상 의류나 신발매장 일부에서 혜택을 볼 수 있는데 조금만 기다리다 보면 당근이나 아웃렛에 같은 물건들이 훨씬 저렴하게 쏟아질텐데 10% 할인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백화점 값에 물건을 사는 이들은 거의 없다.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귀족노조란 단어로 불리는 대기업 노동자도 백화점을 나서며 수중에 생긴 물건보다 고민 끝에 내려놓은 물건들이 훨씬 많을 텐데 신기하게도 이 백화점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봉건제가 사라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굳이 귀족을 꼽자면 나는 이재용이나 정의선 같은 분들이 떠오른다. 엊그제 인터넷 기사는 물론 나의 알고리즘까지 온통 좬슨 황과 이재용 등의 만남을 다룬 영상으로 도배됐다. 그 때문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문득 몇 년 전 NVIDA GeForce 1060Ti와 삼성 반도체로만 제작된 그래픽 카드를 어렵게 수배해 가며 이더리움 채굴기를 제작할 때가 떠올랐다. 사람 간의 문제로 나의 채굴은 얼마 못 가 중단됐지만 꾹 참고 그대로 이더리움을 채굴하여 고스란히 전자지갑에 보유했더라면, ICO나 온갖 잡코인 거래로 탕진한 나의 4 BTC만 온전히 보전했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후회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백화점에서 귀족, 귀족에서 좬슨 황과 이재용까지 그리고 채굴기에서 나의 형편없는 재테크를 돌아보는 맥락 없는 의식의 흐름이 지속되는 동안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사실 최근 나는 물욕이 거의 없다. 시공사 마음대로 지어 놓은 지금의 주택과는 달리 내가 원하는 대로 집을 다시 짓고 큰 개러지를 마련하여 한쪽 벽면을 DeWalt 공구로 가득 채워두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당장 실현 불가능하고 엄청난 자금을 요하는 일이므로 언제나 먼 미래의 희망사항쯤으로 담아두고 있을 뿐이다.


물욕이 없는 마음에 비해 매월 높은 이율로 월급 통장에 닿기가 무섭게 금융기관에 빠져나가는 돈부터 고정 지출이 늘다 보니 역설적으로 요즘처럼 돈이 간절했던 때도 전에는 없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의 자서전 내지는 회고록으로 연재 중인 <조금 이른 인생관찰기>를 쓰며 확신이 드는 것은 내 인생 중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기라는 점이다. 인생의 그래프가 정점을 찍고 추락할까 봐 솔직히 두렵다. 내일이 어떨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여력이 된다면 장기적인 시야로 한 달에 한 주 만이라도 NVIDIA 주식 같은 걸 모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자본주의 문맹은 잠시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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