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전광판을 보니 기다리는 버스가 표시되지 않는다.
버스 앱을 켜서 확인해 보니 회차 지점에서 버스가 있는지 버스가 인식되지 않는다. 대충 10여분 기다리면 될 듯해서 택시를 잡지 않고 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몇 분 뒤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르신 두 분이 오셨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허리도 꼿꼿하시고 음성에도 힘이 있었다. 인근의 큰 도시에서 있을 모임에 가기 때문인지 멋을 내신 모습이었다. 한 분은 머리도 미용실에서 하고 오신 듯했고 두 분 다 목걸이, 귀걸이, 팔찌, 장식이 들어간 선글라스까지 힘준 모습이었다. 보석자수가 들어간 청바지에 흰색 셔츠를 카디건처럼 걸치고 계셨는데 깔끔하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활기차고 멋져보이셨다. 버스에 올라탔는데 어쩌다 보니 두 분이 앞에 앉으셔서 간간히 나누시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누시는 이야기에서 나이 듦에 대한 아쉬움이 있기는 했으나 지금 주어진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계신 듯했다. 그런 두 분의 모습이 좋게 느껴지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나도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꾸미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20대 때도 멋 내본 적이 없고 화장도 필요할 때만 했다. 색조화장은 하지 않았다. 친구가 권해서 한번 써본 마스카라와 아이쉐도우는 눈이 너무 따가워서 바로 포기했다. 립스틱도 튀는 색은 쓰기가 부담스러워 최대한 무난한 것으로 했었다. 파운데이션과 콤팩트 만으로도 얼굴에 뭔가 덧 씌워진 듯 갑갑해서 일할 때 말고는 화장을 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색조화장은 하지 않고 기초화장만 한다. 옷도 잘 입지는 못한다. 우리 집 공식 '옷 못 고르는 사람'이 나다. 어렸을 때는 수수하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고 조금 더 컸을 때는 왠지 화려하게 치장하는 모습에 거부감이 있었다.(남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좋다. 다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에 거북함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혹은 어느 때엔가 치장하는 것이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겨졌던 탓이리라 생각된다. 나이가 들면 수수하게 단촐하게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는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으면 뭔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하. 지. 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삶은 길어졌고 60도 청춘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5060 팬덤이 존재하고 트로트 가수를 아이돌 가수만큼이나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길어진 삶에 맞추어서 노화의 시계도 늦춰지는 듯하다. 이런 변화가 싫지 않다. 젊은이들에게 젊은이들의 문화가 있듯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도(노인이라는 표현이 어색하다) 그들의 문화가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세대를 규정짓기보다는 개인의 취향과 성향이 더 스스로를 보여주는 시대가 된 듯하다. '~다움'이란 말로 규정짓고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표현하고 일상을 만들어가는 모습들이 개인적으로 보기 좋다.
선입견은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올 때 빠른 속도로 분류하여 그것을 취할지 말지 선택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선입견이 너무 완고하다면 경험의 폭을 확실히 줄이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타인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가지고 올 것이고 말이다. 소통의 시대에 불통이 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 중에서 틀을 깨는 것(공식을 깨는 것)이 꽤나 효용성이 있다. '응답하라'시리즈는 드라마의 틀을 깬 것으로 유명한데 덕분에 대단한 성공을 이루어내었다. 그중 '응팔(응답하라 1988)'에 나온 덕선이의 짝 택이를 보면 천재바둑기사로서 바둑을 둘 때는 매섭기 그지없지만 일상에서는 허술함 그 자체다. '머리 좋은 사람=잘난 사람'의 공식이 깨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택이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게 된다.
일상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직장에서 만나지는 사람도 있고 가게들에서 만나지는 사람도 있다. 같은 주거단지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스치듯 지나가는 관계에서 어느 정도 인사를 나누는 관계가 되고 어떤 것을 함께 이야기하고 음식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해나가다 보면 처음 그 사람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다른 면이 있음을 종종 느끼지 않는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만(정확히는 상대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상대를 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지 말이다. 감정적으로 격앙될 때나 혹은 큰 좌절이나 배신을 겪게 될 때, 말도 못 하게 엄청난 행운을 거머쥐게 될 때 흔히 평상시에 상상도 못 했던 모습들이 나오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해 보았을 것이다. 사람은 입체적인 존재라서 한 면만 보고서는 알 수 없다. 친한 사람이라도 모든 면이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면이 있음을 가정하고 '어쩌면....'이라는 가능성 속에서 좋은 면을 찾아보고자 힘써 본다면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말이다) 우리 사는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진출처: Pix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