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옥토
십 몇 전 농사짓던 친구에게서 씨앗으로 쓸 땅콩을 받았다. 그런데 땅콩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친구 왈 작물을 키우다 보면 기형이 나오기 마련인데 그것들을 잘 갈무리해서 이듬해에 심으면 더 실한 놈들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그 땅콩을 겨우내 그물망에 담아 보관을 했다가 봄에 심었는데 어라, 땅콩 줄기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보통 땅콩은 줄기가 커봐야 무릎 높이밖에 되지 않는데 이 땅콩 줄기는 허리 높이까지 자랐다. 더 놀라운 점은 땅콩은 수확 시기가 되면 까치들이 정말로 얄미울 정도로 파먹는데 친구가 준 땅콩은 허리 높이까지 자란 줄기가 쓰러지니 까치가 앉을 자리가 없어서 파먹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수확을 해보니 땅콩 꼬투리의 크기가 엄지손가락만 했다. 꼬투리를 까보니 땅콩 세 개를 잇대면 라이터와 맞먹었다. 세상 본 적 없는 땅콩을 아파트 베란다에 펼쳐놓고 말리는데 과장 좀 하자면 새총으로 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세 알만 먹으면 배가 부를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 땅콩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더니 다들 이게 땅콩이냐고 꽤나 놀라워했다.
그때부터 나는 땅콩을 캐면 가장 실한 놈들을 콜라서 씨앗으로 빼놓았다. 한 번은 아내가 삼십 킬로그램이 넘는 땅콩을 겨우내 다 먹고 나서 베란다에 걸린 씨땅콩을 넘본 적이 있다. 군침을 삼키면서 저걸 먹으면 안 되냐고 묻는 아내에게 나는 저건 씨앗이라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정 땅콩이 먹고 싶으면 생협에 가라고 고함을 질렀는데 아내는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내 땅콩이 제일 맛있다면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사랑이고 뭐고 나는 종자를 양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십 몇 년 동안 나는 땅콩 종자를 관리해왔다.
물론 땅콩 씨앗을 넉넉하게 관리하면서 주변에 나눔을 하기도 했고, 사정이 생겨서 한동안 농사를 짓지 못하는 바람에 애초에 나에게 종자를 나눔했던 친구에게 빚을 갚기도 했다.
작년에는 두더지 때문에 땅콩농사가 흉작을 맞는 바람에 남 몰래 속을 끓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열 평 농사지을 씨앗은 챙겼다. 그런데 무슨 사연인지 올해에는 땅콩밭에 두더지 흔적도 없어서 수확이 꽤 쏠쏠했다. 덕분에 씨앗도 넉넉히 남기고 실한 놈들은 팔아서 인건비도 챙겼다.
농사는 하늘이 주관하고 농부는 그 밑에서 최선을 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씨앗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옛말에 농부는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종자는 그만큼 중요하다.
토종종자를 지키고 보급하려고 애씨는 분들의 노고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그런데 지난 삶을 돌아보면 우리의 마음 속에도 수많은 씨앗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안에는 좋은 씨앗도 있고 나쁜 씨앗도 섞여 있을 것이다.
지난 삼 개월간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우리의 마음 속에는 몇 평인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밭이 있고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 밭에 씨앗을 뿌리면서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곤 한다. 우리의 마음의 밭에 무슨 농사를 지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좋은 씨앗을 뿌렸으면 좋겠다. 더불어 농약도 치지 말고 화학비료도 주지 않으면 더 좋지 않을까. 여기서 얘기하는 농약과 화학비료는 자기 자신을 비관하거나 자존감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나이 탓일까, 자꾸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옥토가 있고 좋은 씨앗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