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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대로 Mar 09. 2024

그럴 리가 없어

  1교시가 시작되고 10분이 지나서야 교실에 도착했다. 15분이 지나야 지각처리되니까 다행이다. 고입 내신 점수 따윈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막상 중3이 되니 다르다. 고등학교는 가야 하니까. 1교시가 무슨 시간인지도 몰랐지만, 복도에 들어서니 알겠다. 교실문이 열려 있고, 에어컨은 빵빵하게 틀어져 있다. 땀 흘리는 체육시간이다. 운동장에 나가야 하나, 다목적실로 가야 하나, 체육관으로 가야 하나, 헷갈린다. 수시로 바뀌니 알 수가 있나? 할 수 없이 3학년 교무실로 갔다. 이럴 땐 내가 지각은 아니라고 선생들에게 알려야 한다. 꼭 담임이 아니라도 된다. 아무 선생이라도 눈도장만 찍고, 시원한 교실에서 쉬면 된다. 다듬지 못한 화장도 하고, 화장실에서 고데기도 좀 말고 그러면 후딱 1교시가 간다. 9월 1일, 아직 열기가 남아 짜증 나는 늦여름의 아침 치고는 이만하면 상쾌하다.

 

  나도 모범생이 되고 싶었다. 수학 계산이 꼬이고 영어단어 외우기가 지겨워질 때, 나는 큰소리치고 싶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데 왜 자꾸 진도는 나가냐고. 하지만 모르는데도 아는 척을 했다. 그래도 찌질이는 되기 싫었으니까. 알겠냐고 묻는 선생에게 나만 모른다고 할 수 없으니까. 엄마는 너라도 제대로 밥벌이하는 여자가 되라고 했지만, 그게 잔소리로 될 수 있냐고. 어른들이 말하는 방법 말고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거다. 눈치 보지 않을 거다. 지금 당장 하라는 것은 지겹고 짜증 난다. 재미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나? 모범생들은 알고 보면 혼날까 봐 억지로 하는 겁쟁이다. 엄마말 들으면 나올 것이 많은 녀석들이나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다. 얻을 것 없는 나와는 다르다.

  중1 때부터 학교는 나의 놀이터였다. 하라는 것을 안 하는 것은 처음이 힘들지, 그다음은 쉽다. 그래도 처음 반항할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 안 하면 혼낼 거라고 선생들은 큰소리치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곳이 학교다. 이것을 알고 나면 학교는 만만한 놀이터가 된다. 처음엔 자주 보는 선생이 시키는 일부터 안 했다. 안 하려고 안 한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모르니까. 꼬박꼬박 학교는 나갔지만, 모르는 것도 꼬박꼬박 쌓였다. 나도 학원은 다녔었다. 엄마가 초등학교 때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어 불쌍하다고 보낸 곳이 공부방이다. 이 공부방에서 문제집으로 익힌 실력으로는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공부방에서는 문제집의 정답지를 떼낸 후 내가 풀어서 통과만 하면 되었다. 일찍 집에 가기 위해서 애쓰는 아이와 달리 대충 하긴 했었다. 식당 일로 바쁜 엄마가 없는 집은 가도 할 일이 없었으니까. 문제집을 풀고 있는 아이들과 놀고 싶어서, 이것저것 묻고 킥킥거리다가 슬쩍슬쩍 답을 보고 적어냈었다. 나중엔 공부방 선생도 지쳐서 대충 맞다고 해줬었다. 동네 공부방엔 내 또래의 중학생도 다녔었다. 그래서 시험 친 후나 방학이 다 되어 갈 때는 놀이공원도 데려다주고, 햄버거와 피자 파티도 했었다. 학교에서 공짜로 햄버거세트를 주기도 했지만, 그거 먹으려면 손껍데기가 벗겨져라 줄을 당기거나, 안 하려는 뺀질이들 비위 다 맞춰주며 단체 줄넘기를 뛰어야 한다. 그런데 거기선 쉽게 해 줬다. 그래서 거기 다녔다. 하지만 학교에선 공부방 다닌 아이들하고 아는 척을 절대 하지 않았다. 우린 찐따였지만 찌질이는 되기 싫었으니까.

  1교시가 끝나는 종이 칠 때쯤 거울을 보며 앞머리와 아이라인을 점검한다. 앞머리가 꺼지면 가뜩이나 처진 눈이 더 처져 보인다. 아이라인은 하품하여 번지기도 하니까 살펴야 한다. 엄마는 앞 트임이 포함된 쌍꺼풀 수술을 해준다고 해놓고선 또 말이 없다. 쌍수해 준다고 해서 내 아르바이트비도 가져가 놓고선. 엄마 가게가 몇 번 바뀌어서 그렇겠지라고 이해하려 한다. 말해서 안 되는 일에 자꾸 신경 쓰면 나만 비참해지니까. ‘이젠 지각하지 말라던 선호는 제 때 왔을까?’가 궁금하다. 학교에 오면 핸드폰을 내야 하니까, 오자마자 3학년 교무실에 들러, 담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모범생이 아니지 개념이 없는 아이는 아니니까. 선호와 나는 서로 연락을 할 수 없을 때는 1교시와 3교시 후에는 무조건 3학년 5반과 6반 사이의 복도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4교시 후에는 각자 남학생 줄 여학생 줄로 급식을 먹으러 가야 해서, 기다릴 수도 없으니까.

  에어컨이 빵빵한 냉장고 같은 교실과 달리 복도는 벌써 찜통이다. 땀에 화장이 번질까를 걱정하며, 체육 수업을 끝낸 민정이에게 화장실을 같이 가자고 했다. 민정이는 체육 시간에 열심히 뛰지 않아 뽀송뽀송했다. 내가 선호를 만나러 복도로 가기 전에, 마지막 점검으로 화장실에 간다는 것을 눈치챈 민정이는 착하게 나를 따라와 주었다. 이래서 민정이는 내 편이다. 민정이는 화장품 가게에서 만났다. 화장 취향이 비슷해서 자주 마주치다가, 같은 반이 되어서 친해졌다. 하지만 내 눈이 더 크다. 그래서 민정이는 나를 부러워한다. 아무리 덧칠을 해도 생긴 것은 따라올 수 없다. 이래서 고민된다. 쌍수를 안 해도 이 정도 되는 눈이 어찌 그리 흔하냐고.

  화장실 앞에서도 눈은 6반 교실을 먼저 향했다. 할 말이 많은 국어선생이 종이 쳐도 잡고 있는 눈치다. 저 선생은 꼭 끝나기 5분 전에 30분 분량의 수업을 하려 한다. 맨날 고등학교 가서도 중요한 내용이니까, 지금부터 챙겨 보라고 잔소리하느라, 수업 내용을 놓쳤을 거다. 시험 진도는 나가야 하니, 혼자 진도 빼고 있을 거다. 지금은 지금 중요한 것만 하면 된다. 미래를 위해 준비하라고 하니 할 것만 많아진다. 그래서 지금 할 것도 제대로 못한다. 선생들은 지금 할 것이 무엇인지만 알려주면 된다. 나머지는 그때 가서 하면 된다. 중학생도 아는 사실을 선생들만 모른다. 마음은 복도로 향해 괴롭게 버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분명히 선호는 나를 보기 위해 뒷문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잘 되었다. 마지막 화장 점검을 더 꼼꼼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으니. 살다 보니 저 말 많은 국어선생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니.

  화장실에서 나와 6반 교실을 자연스럽게 지나가기 위해 애썼다. 민정이가 먼저 나가 만수가 있는 지를 살펴줬다. 선호와 만수는 6반에서 짝꿍이니까. 수학에 자부심이 있는 만수는 국어를 싫어한다. 담임이 국어라서 괴롭다던 만수는 잔소리하는 담임에게 못 알아듣겠다고 “왜 나한테만 화내는데요?”하며 대들었다고 한다. 대단한 만수다. 우리한테는 친절한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선생한테는 날이 서 있다. 선생 앞에서만 약한 척하는 아이들과 우린 다르다. 앞과 뒤가 같으니까. 만수가 민정이를 본 후, 자고 있는 선호를 깨워서 데리고 나왔다. 선호는 나한테 눌린 앞머리를 보여주기 싫어서. 책상에 엎드려 자도 옆으로만 잔다고 했다. 그랬던 선호의 앞머리가 눌려있었다. 앞머리가 눌리면 하루도 눌린다고 했었는데, 웬일인지 모르겠다. 아마 지각하지 않으려, 고데기를 제대로 말지 못하고 등교했나 보다. 이래서 학교 화장실에는 드라이기와 고데기를 필수로 설치해놓아야 한다. 휴지도 제 때 안 주는 학교가 그러는 날이 올까 모르겠지만.

  9월 9일이면 우린 만날 지 100일이다. 100일 기념을 어떻게 할지, 여름 방학 내내 상상했었다. 상상만 해도 설렌다. 키 크고 잘 생긴 선호가 내 남자친구라니, 뒷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는 모습 뒤로 후광이 빛난다. 연애를 시작한 6월부터 내 시간은 꽃길이다. 엄마가 늦게 끝난 가게에서 오지 않아 혼자 눈을 떠도 외롭지 않다. 나만 바라보는 내 편만 있으면 된다. 여러 가지를 얻으려고 아등바등하기보다, 확실한 내 편만 있으면 된다. 내 편이 있으면 자신만만해진다. 선호는 운동을 잘한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서 400m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반한다. 5월 체육대회의 그 모습에 반했었다. 누가 눈치챌까 봐 아무 말 못 하는 나에게 선호가 먼저 다가와 사귀자고 했었다. 키 작은 나를 귀엽다고, 섭섭한 것이 많아 눈물이 맺혀있는 내 눈이 맑다고 했었다. 선호 앞에서는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내 편이니까.

  3교시 후 쉬는 시간에 또 선호를 보려고 복도로 나가려는데, 담임이 교실로 들어왔다. 오늘 사회 수업은 없는데도 반장인 나를 만나러 온 눈치다. 담임은 내가 반장인 것이 몹시 맘에 안 들어한다. 자기 입맛대로 움직이는 싸가지인 도연이를 시키고 싶어 한 눈치였다. 하지만 임원 점수를 일치감치 채운 싸가지가 할 턱이 있겠는가? 그다음으로 잘난 척하는 성민이가 했으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약싹 빠른 성민이는 부반장을 한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점수가 높은 녀석들은 계산도 잘한다. 어쩔 수 없이 압도적인 표를 얻어, 내가 반장이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도 나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도 체육대회, 졸업앨범촬영, 축제, 반별 졸업식 등 행사가 줄줄이 있으니 나서기가 귀찮고 내가 백 하고 큰소리치면 다들 꼼짝도 못 하니까 나를 밀은 눈치다. 순진한 학생은 다 순직한 세상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학생이나 선생이나 계산의 달인들이다.

  담임은 일 시키려고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닌지, 화부터 내고 있다. 오기 싫은 학교를 간신히 선호 보러 왔는데, 짜증 나게.

  “야, 조경이 너 왜 늦었어?”

  “저, 야, 아닌데요?”

  “그래, 조경이 양, 진료확인서나 학부모확인서는 없나요? 그럼 미인정 지각이네요.”

  “아닌네요. 저 10분 늦어 인정인데요.”

  “그럼 지난주 목요일 조퇴는?”

  “그건 생리조퇴 쓴다고 했는데요?”

  “무슨 생리가 수시가 바뀌냐?”

  “제 사정인데요? 이거 성희롱인데요? 신고해요? 사과하세요.”

  “알았다, 알았어. 뭔 말을 못 해. 그래도 학부모확인서는 받아와. 또 담임확인서를 쓸 순 없어. 벌써 세 번째야. 마지막이야. 인정조퇴가”

  

  3교시 후 보기로 한 선호를 못 봤다. 예전 같으면 복도에 먼저 나와있었는데, 담임 때문에 늦어서 그랬나 보다. 역시 선생은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 짜증 나는 맘을 가라앉히고 진로 수업을 하는 모듈러교실로 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는데, 어깨빵을 하는 6반 싸가지 예은이와 우리 반 도연이는 내가 들으라는 듯이 한 마디를 살뜰하게 들려준다.

“너 알아? 있잖아. 김선호와 조경이, 그 둘이 헤어졌데. 조경이가 자꾸 징징거려서 찼는데, 자꾸 매달린다고”

그 옆에 있던 우리 반 싸가지 도연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어머머, 우리 반 반장님 불쌍해서 어쩌누? 하며 박자를 맞췄다.

그 뒤는 들리지도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어제도 우린 분명 카톡을 주고받았다.

  “저녁 뭐 먹었어? ”

  “수학은 다 했어?”

  “졸업앨범 사복촬영 때 옷은 뭐 입을 거야?”

라는 카톡에

  “몰라”

라는 답장이 왔었다. 그럴 리가 없다. 저것들이 질투하는 거다. 저 싸가지들이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몇 번 질문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래서 민정이가 화장실에서 저 싸가지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고 했었다. 그럴 리가 없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민정이네와 우리는 더블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맨날 둘이서만 만나다가, 학교 밖에서 네 명이 만나 놀기로 하니 설렜다. 민정이는 학원에서 만나 사귄 지 며칠 안 되어, 연애 고수인 나에게 잘 어울리는지를 봐달라고 했다. 연애는 해본 사람만이 상대가 어느 정도 좋아하고 있는 지를 알아볼 수 있다. 여름이라 덥지만, 시원한 실내에서 놀면 된다. 이 날을 위해 아르바이트비도 아껴두었다. 선호도 멋지게 차려입고 나타날 것이다. 뭘 입어도 잘 어울리니까. 폼나게 급행을 타고, 서울의 실내 놀이공원을 가기로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땀에도 번지지 않을 화장을 공들여하고 , 키 크게 보이려고 짧은 반바지를 입었다. 민정이와 겹치지 않게, 나는 반바지 민정이는 짧은 치마를 입기로 했다. 다리가 더 예쁜 나에게 반바지를 양보해 줬다. 9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선호만 나타나지 않아 불길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어제 새벽까지도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선호가 멋진 스포츠카라도 타고 오나? 엄… 청… 늦네. 30분이나 지났잖아. 빨리 좀 연락해 봐. ”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출발 전에 DM 왔었는데. 핸드폰을 엄마한테 뺏겨서 급하게 연락하는 거라고… ….”

  

  아버지가 군인이라, 엄마는 선호에게 많이 의지한다고 했다. 막내가 어려 엄마는 항상 피곤한 상태라서, 눈치를 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나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은 선호는 어떻게라도 연락은 했었다. 조금 늦더라도.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경이야, 연락은 제대로 된 것 맞아? 이렇게 아무 대책도 없이 모두 기다려야 해? 우린 그냥 ……..”

  나는 기다리며 페메도 보내고, 인스타 DM도 보냈다. 혹시 몰라 카톡도 보내고 전화도 했다 소용없었다. 민정이 앞에서 제대로 체면 구겼다. 더구나 처음 본 민정이 남친 앞에서도. 언뜻언뜻 학교 선후배도 지나간 것 같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비참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되지 않을 꿈은 가져본 적도 없다. 안 되는 일을 왜 하나? 1등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꼴등이 더 폼난다. 혼자였다면 선호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그대로 버림받은 꼴을 보여주다니, 챙피해서 학교도 갈 수 없을 것 같다. 할 수 없이 민정이를 보내고 집으로 혼자 돌아왔다.

  다시는 선호를 만나지 않으려 했다. 아니 만날 수가 없었다. 학교도 갈 수 없었고, 사람 만나기도 싫었다. 엄마가 이혼했을 때도 이렇게 절망적이진 않았다. 엄마가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나 보다 한참 못한 민정이 앞에서 그대로 무시당했다. 불쌍하고 짜증 난 눈으로 쳐다본 민정이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소문은 학교에 금방 퍼질 것이다. 이렇게 비참하게 버림받았는데 어떻게 학교를 가겠는가? 이틀 만에야 전화가 왔다. 게임하다가 늦잠 잤는데, 엄마가 심부름시켰고. 또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핸드폰을 빼앗겼다가 이제야 겨우 찾아서 연락한다고. 엄마 눈치를 엄청 봤다고, 사정사정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게임도 그만두겠다고 맹세를 해서 용서했다. 그랬던 선호가 그럴 리가 없다.

  

  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에 선호는 알바비를 받았다고, 최신식 노래방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놀자고 연락이 왔다. 버림받은 지난 일은 지났으니, 기억하지 않는다. 고칠 수 없는 일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선호가 내 편이라는 사실이다. 왜 내편이냐면,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할 수 없는   엄마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엄마 이야기는 절대 안 한다. 엄마가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 속상하다는 말을 하면, 겉으로는 위로하지만 실제로는 얕보기 때문이다. 선호는 내 말을 가만히 다 들어준다. 그래서 내편이다.

  팔월의 뜨거운 해가 가라앉은 오후에 칠월 데이트를 위해 샀던 그날의 반바지를 입고 귀여워 보이려고 두 갈래 머리를 토끼처럼 묶고 나갔는데,  선호는 예쁘다는 말을 안 했다. 어릴 때부터 친했다는 친구들에게 내 이름만 말하고 다른 말은 보태지 않았다. 지하로 들어가는 노래방과 달리 삼층에 있는 노래방은 유리창으로 창밖이 보여서 고급 카페에 온 기분이 들었다. 멋졌다. 나는 공주가 된 기분이 들어서 자리에 앉을 때도 선호가 먼저 챙겨서 안내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선호는 눈짓으로만 앉으라고 했다. 자기 친구들과만 낄낄거려, 나는 찬밥신세였다. 화가 난 나는 선호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데려다 달라고 귓속말로 말했다. 부를 노래만 고르던 선호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들어올 때 못 봤어? 입구에 있잖아.”

  이 말을 들으려고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둘이 있을 때는 누구보다 다정했는데, 이렇게 사람이 돌변할 수도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선호는 친구들 앞에서 내가 더 좋아한다고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평소와 다른 말들을 뱉어 버렸다.

  “높은 음도 잘 못 부르면서 어렵고 폼나는 노래만 부르는 거야? 삑싸리 나게.”

  “너나 잘 하셔. 점수는 나보다 낮으면서.”

  “노래도 못하면서 왜 노래방에 온 거야? 차라리 카페에 가지? 시끄럽게. 남자들은 자기가 못하는 것만 골라서 하더라.”

  “남자 비하까지. 어어, 선 넘네.”

  

  “꽥꽥거려 귀 아파. 가창 수행평가 때도 높은음이 많은 노래는 선택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내 말 안 들어?”

  “내가 니 시키는 대로 하는 하인이냐? 선 넘지 말라고 했지. 나 무시하지 말라고.”

  비참하게 선호 친구들 앞에서 싸웠다. 저번엔 나를 버림받게 했으니까 나도 강하게 나가고 싶었다. 둘이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아닌 일인데 남들 앞에서는 일이 더 커졌다. 나라고 선호한테 다 잘한 것은 아니다. 선호가 싫다고 하는 말을 일부러 했다. 지기 싫어서. 그래서 카톡으로, 전화로, 싹싹 빌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선호는 “알았다”는 답장을 했었다. 겨우 용서받았다. 너그러웠던 선호가 그럴 리가 없다.

   1학기에 이어 2학기에도 할 사람이 없어, 반장이 되었다. 귀찮았지만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어서 그냥 맡았다. 9월 둘째 주가 되니, 선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행평가 일정을 발표했다. 특목고 원서 준비를 한다던 도연이는 전 과목 100점을 받을 거라고 한껏 폼을 잡고 있었다. 까다로운 말하기 수행평가나 꾸준하게 챙겨야 하는 수행평가 점수가 생각보다 나오지 않아 예민한 도연이가 나에게 화풀이했다.

  “야! 반장! 수행평가 일정 나온 거 정리는 안 해? 반장이 돼서 그것도 안 챙기고 뭐 하냐? 너 좀 거저 먹는다. 임원 점수.”

  엎드려 자던 나를 깨우는 도연이 말에 응답할 겨를도 없이, 민정이가 대신 대답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우리. 경이 반장님이 요즘 좀 힘들어. 살살해.”

    평소에도 민정이는 빈정거리는 말투다. 겉으로 아부하는 아이들보다 솔직하다고 여겼는데 오늘은 나를 건드린다. 세상에 내 편은 딱 두 명이라 여겼다. 그중 한 사람은 잠수를 탔고, 나머지 한 사람도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민정이 말에 뭐라 대꾸할까를 떠올리기 전에 민정이는 한 발 더 나갔다.

  “아직도 몰랐어? 그때 이미 끝난 거야. 찌질아.”

   나에게 내 편은 원래 없었다. 민정이는 학교에서 내가 밀리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것 같다. 선호와 연애를 할 때는 내가 학교에서 젤 잘 나갔지만, 지금은 밀렸다. 그래서 민정이도 선긋기를 한다. 내가 인기가 없어도 너한테 땡처리당할 주제는 아니다. 실력을 그대로 보여주마. 그래도 실력파인데 몸부터 쓸 수는 없지. 먼저 말로 해주마.

  “야, 최민정! 니가 죽고 싶구나. 어디서 반 푼 어치도 안 되는 주제에 덤벼? 도연이와 너까지 한 방에 보내줄게. 말만 해. 어디까지 날려줄까?”

  겁이 난 아이들이 선생을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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