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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수빈 May 12. 2024

영감은 어디에

가만히 앉아 찾아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는 그것

  흔히들 말하는 ‘영감’이라는 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이 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찾아오기를 묵묵히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가. 한 편의 작품을 끝내고 나서 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이 커진다. 이대로 번뜩이는 영감이 찾아오는 일이 영영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데뷔작으로 ‘천재 감독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고서 기대에 못 미치는 후속작을 내놓다가 사라지는 감독들이 있다. 보석 같은 걸작을 단 한 편만이라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나는 그보다 평작과 수작 사이를 오가더라도 오래도록 꾸준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싶다. 허나 그러기엔 내가 가진 창작욕이 그리 왕성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만큼은 가득한데, 정작 글을 쓸 영감은 그 욕심을 못 따라가는 것이다.


  촬영일을 기준으로 최근 작품들 사이의 공백기를 계산해 보았다. 


장편 <선이> - 2년 4개월 - 단편 <상이의 비디오> - 1년 8개월 - 단편 <과정의 윤리> - 2년 9개월 - 단편 <지구 종말 vs. 사랑>


  활동량이 왕성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일 년에도 두세 편의 장편영화를 공장처럼 찍어내는데, 나는 고작 단편영화를 찍는 데 약 2년의 공백기가 필요한 셈이다.


  오래전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 심어져 있던 가장 큰 두려움은, 언젠가 이대로 영화를 만들 의지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영화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영화과를 졸업한 후 한동안 본인 작품을 준비하다가, 의지를 꺾인 채 다른 분야로 옮겨가거나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지. 물론 그들 각자가 처한 상황, 영화 일을 지속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것임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생각의 변화를 존중한다. 그런데 영화가 아닌 다른 꿈을 쫓을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는, 아니 그보다는 영화에 대한 ‘집착’을 조금도 버리지 못한 나는 언제까지고 영화를 놓지 못할 것만 같다.

  내가 두려워하는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떻게든 ‘감독님’이라 불릴 수 있는 유효 기간을 연장시키려고 애쓴다. 어떤 상황이건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그 방법이다.


  영화를 만들지 않는 동안 가만히 누워서 영감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린 건 아니다. 미국 공포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추어들이 영감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프로들은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 이대로 영감을 거저먹을 궁리만 할 순 없는 노릇. 스티븐 킹 선생의 말씀에 자극받은 나는 보다 프로페셔널 한 작가이자 감독이 되기 위해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유명인의 격언은 약발이 짧고, 누구에게나 다 들어맞지도 않는다. 억지로 쓰기 시작한 글은 쓰는 즉시 쓰레기가 될 것임을 직감했고, 얼마 후 다시 읽어 보니 역시나 쓰레기였다. 스스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글을 썼으니, 그것이 남에게 재밌는 글이 될 리가 만무했다. 아무래도 내겐 영감을 사냥하는 프로가 될 재능이 없는 것일까.


  시나리오가 안 써질 때는 영감을 길어 올릴 길 없는 나의 시시한 인생을 탓하게 된다. 힘겨운 유년 시절, 청소년 시기의 비행, 배낭 하나 메고 떠난 세계여행, 고된 상업영화 현장 참여 등 무엇 하나 남다른 모험을 한 게 없으니 영감 같은 게 생길 리 없는 거라고.

  이대로 가끔씩 떠오르는 볼품없는 아이디어를 주물러서 허무맹랑한 영화나 만드는 감독으로 남는 건 아닐까. 이를 극복하려면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고민에 빠져 있던 중,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위안을 주는 문장을 찾았다.


당신의 일상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당신의 일상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스스로를 질책하십시오.

당신의 일상의 풍요로움을 말로써 불러낼 만큼

아직 당신이 충분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진정한 창조자에게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보잘것없어 보이지 않으며

감흥을 주지 않는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낄 때, 이를 핑계로 내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창작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릴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너를 둘러싼 환경이나 특별할 게 없는 일상이 아니라, 그 속에서 풍요를 발견하지 못하는 너의 무감함에 있다는 말이 따끔하게 와닿았다.


  일본의 어느 유명 작가는 그 흔한 아르바이트 경험 한 번 없이도 인기 만화 ‘이누야샤’를 창작했다는 일화를 보았다. 창작에 있어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꼭 다채로운 삶의 경험을 쌓지 못했다고 해서 창작을 못할 것은 없다는 것. 심심한 일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문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대상을 매번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과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던 길,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사회’의 전경을 눈에 담으며, 전에는 아무런 감흥 없이 지나갔을 그 길이 어찌나 생경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던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앞으로 평생 이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리라’ 다짐했건만, 그 마음이 무색하게도 내게 세상은 금세 무덤덤하게 익숙해졌다.


  릴케의 가르침과 ‘이누야샤’ 작가의 일화 덕분에 내가 다음 영화를 만들지 못할 핑계거리는 속절없이 제거되었다. 그러니까 별 수 없이 또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무감각한 일상과, 조금 전에도 무심히 지나쳤던 풍경 속에서 기어이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러자’고 마음먹는 순간 가능해지는 것일까?

  지금도 종종 창작의 벽에 가로막힐 때면 그때 그 택시 안에서 느꼈던 기분을 떠올린다. 일상을 다시 오색찬란하게 감각하려면 다시 군대라도 갔다 와야 할까. 그런 상념에 잠길 때쯤, 목적 없는 산책길을 나선다. 영감을 찾기 위한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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