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솔직해져야 할까?
개인 블로그에 잡다한 주제로 글을 쓰거나 시나리오를 쓸 때면, 문득 내가 어떤 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다. 한동안 꽂혀버린 단어나 특정한 묘사를 반복한다거나, 이전 시나리오에서 써먹었던 설정이나 공간, 상황이 엇비슷하게 재활용된다. 예를 들면 유독 건물 옥상이나 학교 운동장이 글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식이다. 그럴 때면 혹시 눈치 빠른 관객들이 이 사실을 알아챌까 두렵다. ‘이 감독이 만드는 영화는 뭔가 다 비슷비슷해.’ 언젠가 등 뒤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올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섬찟해진다.
어째서인지 인풋과 아웃풋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다. 영화나 책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많이 보고 읽는데도, 예술적 양분을 섭취하는 양에 비해 뱉어내는 창작물의 신선도는 다소 떨어지는 것 같다. 화장품이나 딸기 우유 등에 들어가는 염료인 ‘카민’을 1kg 추출하기 위해서는 약 10만 마리의 연지벌레 암컷이 필요하다는데, 내가 그럴듯한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하는 데에도 이처럼 엄청난 양의 시간을 투자해 갖가지 삶의 양분을 흡수해야만 한다. 정말이지 ‘가성비’ 떨어지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설령 내 영화 속에서 비슷한 요소가 반복되더라도 그것을 ‘스타일’이라고 우길 수 있을지 모른다. 매번 비슷한 작품을 만든다는 대중들의 비판과 싸워야 하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줄 세울 수도 있지만, 이는 그만큼 그 예술가의 인장이 확실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예술가는 결국 하나의 주제를 평생 반복할 따름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러나 고작 아홉 편의(그마저도 대부분 단편) 영화를 만든 주제에 벌써부터 고정된 스타일이 생기는 건 사양하고 싶다. 특히 이슬아 작가의 글처럼 (자신의 가족과 같이) 동일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하면서도 맛깔나고 풍성한 문장들을 얼마든지 써 나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결과물을 볼 때면 조금 부끄러워진다.
이슬아 작가의 책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으며 ‘반복’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영화나 글에서 전부터 버릇처럼 사용해 오던 요소를 답습한다는 의미에서의 반복이 아닌, 생산적인 일을 매일 같이 이어 나간다는 의미에서의 반복 말이다.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물론 경제적 바탕이 우선한다지만) 매일 한 편씩 글을 완성해 나갔다는 작가의 유명한 일화처럼, 나 역시 성실하게 글 쓰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답습이라는 의미의 반복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만이 유일한 방도가 아닐는지. 살면 살수록, 어떤 일에 보다 쉽게 다다를 수 있는 지름길이나 치트 키 따윈 없노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슬아 작가가 내게 큰 감흥을 주는 건, 텍스트 외적인 성실함뿐만 아니라 글에 담긴 솔직함 때문이다. 특히 ‘성’이나 ‘몸’과 같이 아주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묘사하는 대목을 마주칠 때 더 그렇다. ‘헛, 어쩜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얼굴 없는 작가로 활동할 각오가 아니라면 절대 담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타인에게 읽히는 게 괜찮을 수 있다니, 그 담력이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솔직함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서, 난 오래전부터 솔직한 사람이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 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욕하고 싶은 인간에겐 시원하게 욕도 갈겨 주고.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분명하게 표현하면서 살 수 있다면 한층 가뿐한 삶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은 잃을 게 많은 존재라서 후환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좋은 친구로라도 남으려면 애써 두근대는 마음을 숨겨야 하고, 내 얼굴이 남의 주먹에 닿는 게 유쾌하지 않다면 욕도 삼켜야 하고, 무난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유지하고 싶다면 싫어도 좋다고, 좋아도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일기장과 같은 용도로 시작한 블로그에서만큼은 가능한 솔직한 글을 쓰려 했다. 갖은 이유로 현실에서 하지 못한 말들, 때로는 사회 인식에 반하는 꺼림칙한 생각들까지 마구 써 갈겼다. 그렇게 쌓인 글만큼이나 블로그를 운영한 시간도 길어지다 보니, 온라인 이웃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만난 지인들이 종종 블로그를 찾아 주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들과 이웃을 맺고, 때로는 댓글을 통해 응원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기분 좋은 순간들을 나눴다.
하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읽는 일기장에 쓰인 글이 진정 일기라고 할 수 있겠나. 나를 아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 된 만큼, 블로그는 점차 내 일기장의 역할에서 멀어졌다. 누군가에게 읽힐 것을 의식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게 꼭 나쁜 결과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비록 솔직함의 농도는 비교적 떨어졌을지 몰라도, 의식적으로 다듬은 단어와 문장을 쓰게 되니 글의 질이 훨씬 좋아진 것이다. 돌아보면, 블로그 초기에 내 글이 담고 있었다는 ‘솔직함’이라는 것도 고작 기분과 언어를 순화하지 않고 마구 배설하는 데 그친 정도였다. 그러니 아쉬울 게 별로 없었다. 오히려 아무렇게나 쓴 문장들은 누군가의 면전에서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것과 다를 게 없어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부끄러워졌다. 그 같은 글은 혹여나 누군가 볼까 싶어 모두 감춰 버렸다.
‘적당히’ 솔직한 사람이고 싶다. 솔직하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솔직함은 여전히 부러운 매력이지만, 어떤 일이건 너무 딱딱한 확신을 갖는 게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솔직한 사람’이라는 기분에 도취되어 과감하게 헛소리를 하거나, 타인의 마음을 제멋대로 할퀴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이들이 주변 사람들과 불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무조건 솔직한 사람보다는 지금처럼 적당히 눈치 볼 줄 아는 편이 나은 것 같다. 당장 확신에 차서 내뱉은 솔직한 한마디가 훗날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한 80% 정도만 솔직해져도 좋을 것 같다. 적어도 어느 정도 솔직해지는 게 미덕인 글쓰기에서만큼은. 너무 사적이거나 내밀한 이야기는 할 용기도, 굳이 그러고 싶다는 의지도 없으니 딱 80% 정도만 솔직하게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솔직해서 마음 줄 수 있는 글을 써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이웃들을, 지인들을, 그리고 관객들을 내 글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