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과 타협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최근에 연출한 단편영화의 후반작업이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촬영을 마친 지도 벌써 세 달이 넘었는데, 쉬는 날을 제외하곤 매일같이 사무실에 출근해 편집을 하고, 색 보정, 음악, CG, 사운드 믹싱 작업을 차례로 이어 갔는데도 이 지긋지긋한 마라톤의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편집을 마치고 나면 내가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작업은 없다. 색 보정은 컬러리스트, 음악은 음악감독, CG는 전문 업체, 사운드 믹싱은 사운드 수퍼바이저 등 이렇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남은 후반작업을 맡아 진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쓸 때나 편집 단계에서 구상했던 것을 온전히 구현하려면 작업자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몇 단계 수정 작업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다. 마법처럼 한 번에 정확히 내가 원했던 결과물을 넘겨받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잘 없다. 분명 나의 의도를 또렷하게 설명했고 서로가 같은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느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수차례 찾아온다. 그들이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소통이란 어쩌면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결과물을 주고받으며 수정하는 과정이 길어지다 보면 나와 작업자 사이에 어떤 긴장이 생기기 시작한다. 감독인 나는 아직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물을 얻지 못했는데, 작업자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쯤 했으면 이제 그만하자’는 분위기를 은근히 풍기는 분들도 더러 있다. 이해한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기준과 자부심을 가지고 경력을 쌓아 온 사람들일 텐데, 감독이라는 사람이 갖은 이유로 퇴짜를 놓으면 번거롭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하지만 이게 어떻게 찍은 영화인데. 싫은 눈치에 못 이겨 이대로 수정을 멈춘다면 앞으로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반복될 고통과 부끄러움은 오롯이 내 몫이 된다. 매 장면마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아, 이게 원래는 이렇게 하려고 했던 게 아니고요...’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관객들은 최종 결과물로만 작품의 호오를 판단할 테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타인이 나로 인해 불편해하거나 피해를 입는 걸 못 견뎌하는 성격이다. 때문에 후반작업을 할 때마다 난처한 딜레마에 처한다.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수정 작업을 더 해야 하는 게 분명한데, 길어지는 작업 기간과 더해지는 요구사항에 작업자는 지쳐 가는 듯 보이고, 그의 목소리에도 어쩐지 날이 서기 시작하는 것 같다. 게다가 저예산 독립 단편영화임을 감안해 작업비도 풍족하게 받지 못한 상황이라면, 더 이상 작업을 요구하기가 어려워진다.
데이빗 핀처나 제임스 카메론과 같이 이른바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감독들은 현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해 같은 쇼트를 수십 번씩 찍어서 배우와 스태프들을 녹초로 만들고, 후반작업 과정에서도 자신의 비전이 그대로 실현될 때까지 작업자를 괴롭힌다고 알려져 있다. 마음 같아서는 나 또한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데, 마음이 무른 건지, 종종 100% 확신이 들지 않더라도 ‘그래, 이 정도까지 했는데 안 됐으면 안 되는 거지, 뭐.’ 하고 어물쩍 넘어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화를 대충 찍거나 헐겁게 매듭짓는 건 결코 아니다. 그 순간 주어진 시간과 환경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을 내린 거라고 믿지만, 결과물만 놓고 보면 보다 극단적으로 영화만을 위한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이 남는다.
최근 작품을 찍으면서 기술적인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광량이 시시각각 달라져 장면 연결이 곤란해지고, ‘지잉-’ 하고 지속되는 노이즈가 동시녹음 사운드를 더럽히고, 촬영장 주변에서 진행 중이던 공사 소음이 배우들의 대사 곳곳에 묻어 있었다.
편집과 색 보정을 통해 장면 간의 연속성을 최대한 맞추고, 녹음된 사운드의 지저분한 소음들을 최대한 제거하는 등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지만, 나로서는 결과물이 너무나 아쉬웠다. 혹자는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라서 편집으로 어떻게든 원본이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프로덕션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나 부주의로 빈약한 원본 소스를 들고 찾아간 감독에게 후반작업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후반작업은 마법이 아닙니다. 원본이 좋아야 돼요.”
그렇게 삐걱거리는 영화를 반복해서 보다 보니 몹시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현장에서 발생한 우연한 사고와 실수로 영화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남기다니. 이 영화가 과연 ‘영화’로써 성립할까. 과연 관객들이 이 영화를 온전히 한 편의 영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감독님이니까 예민하게 들으시는 거지, 일반 관객들은 잘 몰라요.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으셔도 돼요.” 장면 곳곳에 깔린 공사 소음과 노이즈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내게 사운드 믹싱 실장님이 말씀하셨다. 과연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영화의 제작 과정을 함께한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기술보다는 영화의 내용에 집중할 일반 관객들은 그런 것쯤이야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갈 확률이 더 클 것이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라는데, 이만 끝낼까...’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워 영화의 모난 점을 찾고, 그것을 다듬는 과정에 지쳐버린 내게 그런 유혹이 찾아온다. 그러나 내게 분명하게 보이고 들리는 결점들을 차마 모른 체 넘어갈 수 없었다. 지금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간 것들에게 언젠가 덜미를 잡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ADR(후시녹음)과 추가 믹싱 작업을 더 하기로 했다. 그만큼 큰 비용을 지출하고 시간을 더 쓰게 된 것이다.
나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완벽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내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만큼, 내 기준으로 새로이 정의한, 조금은 완만한 의미에서의 ‘완벽’에 다다르기 위해 애쓴다. 스스로 웬만큼은 수긍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면 그것을 완벽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완벽’을 목표로 작업하고 있지만, 실은 언제나 타협의 연속임을 느낀다. 이는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 의도를 완벽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완벽을 향한 의지와 타협을 오가며 완성된 작품은 처음보다 훨씬 멀끔한 모습이다. 하지만 여전히 들키고 싶지 않은 결점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것 같다. 워낙 많은 수정 작업을 거치다 보니 작품이 이곳저곳을 기운 누더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쉬움이 큰 만큼 작품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기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런 작품도 결국 내 손을 떠나 관객들에게 닿을 날이 올 것이다. 어쩌면 내가 우려했던 지점들을 관객들이 똑같이 느낄지도, 아니면 내가 너무 사소한 결함을 부풀려 지레 겁먹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부디 후자이길 바라며, 이제는 후반작업을 마치고자 한다. 이것이 내 영화가 가진 최선의 모습이길 바라며.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관객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 완성된 작품은 이후 <지구 종말 vs.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