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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고통에서 배울 수 있는 것

by 전수빈

한창 회사가 바빠지기 시작하던 10월의 어느 날, 문득 PC 카카오톡을 켜 보니 함께 작업했던 배우님과 지인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감독님 축하드려요...!!’, ‘수빈 씨 축하드립니다!’

‘대체 뭘 축하한다는 걸까’ 싶은 동시에 어떤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친 나는 지체 없이 서울독립영화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조금 전 올라온 따끈따끈한 영화제 선정작 발표 공지를 확인한 나는 벅차오르는 감격을 억누르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우리 영화 서독제 간다!!”


나는 곧바로 이 소식을 회사 동료들과 스태프, 배우들에게 알렸다. 마치 꿈속을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꿈에 그리던’ 서울독립영화제 초청 소식이었다. 너무 얼떨떨한 나머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시상식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감독이나 배우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어정쩡한 얼굴로 일어나는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방방 뛰는 마음에 그날은 걸어서 퇴근했다. 다리를 건너는 길에 공원을 달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혹시 이게 꿈이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앞뒤로 짝짝 약수터 박수를 치며 걸어갔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찌릿한 감각이 생생한 걸 보니 분명 꿈은 아니었다. 천국을 거니는 것 같았다.


영화제 선정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마 후,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덜컥 맡게 되었다. 경북 지역의 산업단지 홍보영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미 다른 영상 제작사에서 진행을 하다 중단되어 우리 회사로 넘어온 프로젝트인 만큼 빠듯한 스케줄에 맞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제작 기간과 예산 면에서 당시 회사 규모에 비해 꽤 큰 프로젝트였기에, 대표는 ‘이번 일을 잘 마쳐야 다음 큰 건도 딸 수 있다’는 식의 압력을 은근슬쩍 불어넣었다. ‘시간은 없지만, 아무튼 잘 만들어야 돼!’ 여러 모로 부담스러운 작업이었지만 달리 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팅 때 만난 클라이언트사의 PM(프로젝트 매니저)은 벌써부터 결과물에 걸고 있는 기대가 큰 눈치였다. 내가 전에 연출했던 광고 자료를 이미 받아 보았다며, ‘잘 만들어 주실 거라 믿는다’는 말을 이후에도 만날 때마다 반복했다. 이전에 작업했던 광고라고 해 봐야 몇 편 안 되는데다 솔직히 완성도가 썩 훌륭하지도 않은데, 뭘 믿고 이리 호들갑일까. PM의 태도가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어쨌거나 기대를 걸고 있는 만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꼼꼼하게 스토리보드를 짜고, 촬영 계획을 점검했다.


전 스태프가 경북 지역에서 숙박하며 진행된 3일 간의 촬영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홍보영상이 담고자 했던 미래지향적인 이미지와 달리 실제 촬영을 진행했던 산업단지의 로케이션은 영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낡은 건물, 어두컴컴한 공장 내부, 생활 흔적들로 어지럽혀진 사무실, 먼지 쌓인 채 방치된 제품 등 어딘가 먹구름이 드리운 듯 내세우기 민망한 모습들뿐이었다. 흔히 광고에서 보이는 첨단 시설, 스마트 로봇, 미래형 사무실, 건강한 미소의 산업 일꾼의 이미지는 다분히 실제 일터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다소 난감한 환경 속에서 최대한 기지를 발휘해 촬영을 진행하면서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촬영을 마친 후, 약 일주일이 지나 첫 편집본이 나왔다. 결과물은 물론(?) 엉망이었다. 나조차도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함께 결과물을 검토하는 대표의 얼굴을 힐끗 보니 그 역시 동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표의 피드백에 따라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PM에게 결과물을 첨부한 메일을 보냈다. 혹시나 그가 바로 메일을 확인할까 싶어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혹시 의외로 맘에 들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도 안 차는 기대를 걸어야만 했다. 내일을 생각하니 퇴근을 해도 계속해서 일이 어깨에 얹혀 있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결과물을 확인한 PM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감독님, 아마 준비하는 시간도 빠듯하고 해서 결과물이 다소 아쉽게 나온 것 같은데요...” PM의 목소리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게 이런 똥을 던져 준 게 사실이냐?’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게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완전히 망쳐버렸다. 업계 용어로 ‘똥을 싼’ 것이었다. “최대한 수정을 해보고 다시 보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억겁의 시간 같던 통화가 끝나고, 이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를 두고 회의가 열렸다.

모두의 입이 바위에 눌린 듯 무거웠다. 나 또한 그 가운데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재촬영’ 혹은 ‘추가 촬영’처럼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오갔다. 나는 변명하고 싶어졌다.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로케이션이 좋지 못했다, 예산상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애초에 받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었다...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던 변명에도 나름 타당성이 있다고 믿었지만, 어쨌거나 내가 할 수 있다며 승낙한 일이고, 그 결과물은 온전히 내 책임이었다.


나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문득 울컥하고 차오르는 느낌에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곧장 비상계단으로 달려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오고,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단순히 일을 하나 그르치거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걸 넘어서서 영혼이 박살나는 것 같았다.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몸을 담근 기분이었다.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다시 들어간 사무실에는 대표와 동료 직원들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울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전면 재편집을 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망친 일을 어떻게든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물은 엎질러졌기 때문에 ‘이걸 다 닦을 수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데 시간을 쓸 여유도 없었다. 당장 물을 닦을 휴지를 뽑는 게 최우선이었다.


홍보영상은 전면 재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편집에 사용된 촬영 클립 중 어설픈 부분들을 덜어내고, 부족한 그림은 ‘셔터 스톡’에서 기존 영상 소스를 구입해 대체했다. 재편집을 진행하며 나는 점차 분노의 화신이 되어 갔다. 그 화는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고, 수정 과정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 오는 PM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나는 종종 편집을 하며 욕을 중얼거렸다. 때로는 내게 말을 거는 동료에게 대답하는 것을 까먹을 정도로 머릿속이 불순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작업하는 내내 이 일만 끝나면 회사를 때려치울 거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때 당시의 나는 누가 봐도 어딘가 위험해 보였을 것이다.


몇 주 동안 버스가 끊길 시간까지 편집하며 수정을 거듭한 결과물은 직접 촬영한 분량이 4할은 될까 말까 한 누더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 과정에서 PM이 원했던 지점과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갈 수 있었고, 얼마 뒤 작업을 완전히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영영 PM의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영상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내 감각만 믿고 나머지는 기술 스태프들에게 의지해 왔던 것들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달았다. 그래야만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려면 어떤 렌즈와 구도, 기법을 선택해야 하는지, 각각의 색채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나 느낌, 미술적 구성의 중요성 등을 기본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네마토그래피, 촬영의 모든 것’과 같이 약 600페이지에 이르는 책을 구입해 꼬박 한 달을 읽었다. 기술적으로 이해하는 범위가 늘어날수록 자신감이 천천히 회복되었다. 그동안 내가 무엇을 몰랐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대강 감으로 짐작하며 작업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불확실한 요소들을 확실한 지식으로 치환해 흡수하는 과정에서 ‘다시 해볼 수 있겠다’는 의지를 되찾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시간을 헤엄치다 보니 서울독립영화제 시즌이 다가와 있었다. 연일 폭증하는 코로나 감염자로 인해 다소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에 진행된 축제였다. 2020년 2월, 코로나가 막 창궐하기 시작하던 때 함께 촬영했던 배우들을 그해의 끝자락에 한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니 무척 감회가 새로웠다. 비록 거리두기로 인해 매진에도 불구하고 좌석을 절반만 채운 채 영화를 상영했지만, 그마저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단편영화와 홍보영상, 같은 시기에 최고의 성공과 최악의 실패를 나란히 맛보았다.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 셈이다.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의 한 장면. 동성 연인에게 버림받고 실의에 빠진 프로스트 학자 ‘프랭크(스티브 카렐)’는 공군 조종사를 꿈꾸었지만 자신이 색맹이라는 걸 깨닫고 절망한 ‘드웨인(폴 다노)’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라고 알아? 프랑스 작가이자, 완전 패배자, 직업도 가져 본 적 없고, 짝사랑에, 게이인 데다, 아무도 안 읽는 책을 쓰는 데 20년을 쓴 사람이지. 그래도 아마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작가일 거야. 아무튼 그가 삶의 끝자락에 섰을 때 뒤를 돌아보니, 고통 받았던 그 수 년 간이야말로 생애 최고의 시간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야. 그 시간들이 그를 만든 거지. 행복했던 시간들? 완전 낭비였어. 배운 게 없었지.”


이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땐 프랭크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고통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뭐가 있다는 거야?’ 다들 행복한 삶이 최고라는데, 그렇다면 가능한 한 삶의 고통은 줄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게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일을 크게 망쳐 나락으로 떨어져 보고, 그곳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기어 올라와 보니 비로소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비록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사이어인처럼 비약적인 전투력 상승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이 경험이 나를 조금은 더 의연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더 높은 성취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고통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행복. 어쩌면 천국과 지옥을 의인화 한다면 하늘과 땅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같은 높이에 나란히 서서 공을 주고받는 친구에 더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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