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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Nov 22. 2024

예민과 외면으로 인해

작은 눈송이는 결국, 통제할 수 없는 눈덩이가 되어버렸다.

한동안 친구들이 '복치윤'이라고 불렀었다. 개복치처럼 예민하다고 생긴 별명이었는데 개복치는 2미터 이상 자라는 덩치와는 다르게 매우 소심하고 예민하고 작은 상처나 빛의 변화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정도가 심하면 죽기도 한단다. 큰 덩치에 비해 예민함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개복치, 나 또한 여자치고 큰 키와 예민함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게 사실인지라, '개복치'라는 별명이 크게 타격감은 없었지만, '죽음'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나의 예민함에 대해서 생각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AI처럼 감정을 느끼지도 인식도 할 수도 없는 게 아니라면, 감정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나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무겁게 받아들였고, 롤러코스터를 타듯 감정의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행복해했고, 누군가의 슬픔이 내 슬픔처럼 느껴져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어느 날은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상대방을 보며 화를 내기도 했다. 항상 센서가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처럼 내 감정은 긴장과 예민이 따라왔다. 감정들이 요동을 칠 때마다 어떠한 감정인지 구별도 되지 않고, 해소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내 감정들이 만들어내는 급격한 상향성과 하향성의 그래프는 나의 불안정한 정서를 드러내는 것 같았기에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고 평온하게 수평선을 유지하며 지내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그들처럼 평온한 감정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나는 왜 사소한 일에 일일이 반응하는 걸까, 예민해서 피곤하다...', 결국 내가 예민하게 반응할수록 피곤해지는 것은 나였기에 감정의 그래프를 일직선으로 만들고 싶었다.


일직선의 감정선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선택한 방법은 '외면하기'였다. 외면하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켜지는 감정의 센서를 인식하지 않은 채 무시하기였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갔던 식당에서 가족단위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동네방네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떼를 썼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식사시간을 방해받는 기분이 들었고,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커질수록 나의 불쾌감은 커져갔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부모에게 아이를 조용히 시켜달라고 말하지도 못했고, 식당직원에게도 차마 자리를 옮겨달라 말하지 못했다. 불편한 마음을 무시한 채 침묵했다. 다짐한 대로 마음에 싹튼 감정을 외면하면 할수록 해소되지 않은 불쾌한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고, 이미 켜진 센서등은 꺼지지 않은 채 요란하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식당에서 나오고 난 뒤에는 사소한 일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다른 차들이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끼어들었고, 신호등의 신호는 왜 이렇게 짧은지 가는 길마다 신호에 멈춰 섰다. 점점 커지는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즐겨 듣는 노래를 재생했지만 그날은 달콤하고 따뜻했던 가수의 음색이 소음처럼 느껴졌다. 평소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집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철저하게 감정을 무시한 뒤엔 어떤 결말이 왔을까?

평소와 다를 게 없었던 저녁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억누르고 있던 감정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였고, 옆에 앉아 맥주 한잔과 안주를 마시며 조잘조잘 얘기하는 동생의 입에서 나는 소리가 내 고막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결국 참고 참았던 경고음이 결국 폭발해 버렸다. "말을 하던지 먹던지 둘 중 하나만 해!!!!", 당황한 기색의 동생의 얼굴을 뒤로한 채 문을 쾅 닫고 들어와 버렸다.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다 먹고 말하라고 하며 넘어갔을 상황이었다. 그렇게 난 외면해 버린 감정으로 인해 동생에게 화를 내버렸다.


누구나 이런 경험 한 번쯤을 있었을 거다. 또 다른 경우로는 상대방을 배려한다며 했던 행동들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이라던가,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해 끙끙 앓다가 결국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린 날이 그렇다. 이런 경험들이 무시한 채 지나쳤던 감정들로 인해 또 다른 큰 감정을 낳아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알아차리고 해결했다면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휩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복치처럼 예민하게 구는 것이 싫었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웠다. 아님 죽음에 이를까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외면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조그만 눈덩이를 언덕 위에서 내려 보냈을 때 큰 눈덩이가 되어 버리고 커져버린 눈덩이는 점점 속도가 붙어 끝내는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결국 폭주해버리고 만다. 개복치가 스트레스를 받아 죽게 되는 상황은 결국 외면해 버린 감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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