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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의 말들

언덕에서 눈덩이가 굴려지듯이

한때 소중했던 것들

by 엄민정 새벽소리
세월이라는 도도한 강물 앞에서 나는 가까스로 깨닫는다.
자식이 건네드리는 모든 것이 부모의 마음에서 매번 크게 불어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용돈이든 문자든, 자식으로부터 건네받는 모든 것은 부모 마음에 스며들기만 하면
언덕에서 눈덩이가 굴려지듯이 몇 곱절로 불어난다.

-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벌과 나비에게 대목인 계절이면, 뒤뜰을 지나는 사람들은 마치 연기를 쫓듯 손을 휘젓곤 했다. 벌나비는 내게 관심도 없는데, 꽃도 아닌 것이 지레 손사래를 치며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다. 익충들의 중매쟁이 역할은 한여름 불그스름한 열매로 성혼을 입증했다. 폐백 치맛자락에 밤과 대추를 듬뿍 담은 신혼부부처럼, 풋풋한 나무들은 무거운 열매를 달고도 싱그럽게 웃었다.


한여름의 피자두는 즙이 많고 무척이나 달콤했다. 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맛이 살짝 가미되어 지루할 틈 없는 맛이었다. 엄마는 틈만 나면 자두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이제야 그 노래를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자두는 삼시 세끼가 되었다. 밥 하기 싫은 여름날, 싱싱한 자두는 넉넉한 양식이 되어 주기도 했다. 한입 베어 물 땐, 한 방울의 즙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흐읍' 하는 들숨소리가 제법 날렵했다. 한데 웅크려 앉아 그러고 있노라면, 흐읍 소리는 돌림노래가 되었다. 반복되는 후렴구로 클라이맥스를 맞은 노랫소리에 나는 피식했고, 가족들은 내가 웃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뒤뜰에 열리던 자두는 엄마에게 인생 자두였다. 이사를 하며 집을 처분할 때, 엄마가 가장 아쉬워했던 것도 결국 자두나무였다. 우리 가족은 그 후로 그만한 자두를 먹어본 적이 없다. 비슷해 보이는 것을 청과 시장에서 산 적은 있지만, 매번 속은 느낌에 그 짓도 그만두었다.


엄마의 방문을 맞아 제일 맛 좋은 자두를 수소문했다. '공룡알'이라고 부르는 미국산 피자두 한 박스를 구해놓고 나는 마음이 많이 흡족했다. 엄마는 예상했던 대로, 자두로 세끼를 채우셨다. 마치 오랜 벗을 다시 만난 사람처럼, 손끝으로 굴려가며 이리 보고 저리 비춰보았다. 그 틈에 자두는 맨질맨질한 광택을 띠기도 했다. 엄마는 껍질을 한 겹 벗기며, 루비 같은 과육에 매번 처음처럼 감탄했다. 맛이 좋다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이 담긴 감탄이었다. 시간의 향과 기억의 무게, 그리고 그리움의 색이 과육에 스며있는 듯했다.


며칠 후, 자두 한 박스를 더 샀다. 그리고 엄마는 한 알 한 알 보석을 다루듯 귀하게 드셨다. 맛과 함께 소환되는 그 시절의 시큼한 애한에 목이 메는 듯했다. 엄마는 한 달의 여행 동안 자두만 마음에 담고 돌아갔다.


"우리 딸이 자두를 두 박스나 사줬어. 자두가 정말 맛이 좋았어."

지금도 엄마는 그 이야기를 반복한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다.

이 여인은 만족시키기 참 쉽구나.


다시, 그 여인의 방문을 앞두고 나는 자두를 검색한다. 까탈스러운 딸은 뭘 가져다줘도 툴툴댔지만, 백발이 성성한 엄마는 이리 작은 열매로도 행복해지는 쉬운 사람이었다. 그 작은 행복 앞에 나는 문득 목이 멘다. 엄마의 앞날에 자두철이 몇 번이 남았을까를 짐작해 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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