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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의 말들

그 노인, 이름이 있었어?

'노인과 바다' 톺아보기

by 엄민정 새벽소리

노인도, 소년도, 이름은 있었다. 일독은 내용이 궁금해서였고, 이독은 아는 내용이라 건방지게 읽었다. 삼독을 하기 전까지 나는 눈을 떴지만 눈을 감고 읽은 것이었다. 이제야 이르러, 나는 그 주제가 단순히 세상에서 외쳐대는 불굴의 의지와 명문장 -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 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놓치고 있던 문장들을 톺아본다. 너무나 사소해서 눈길조차 가지 않았던 문장 안에 그 많은 힌트가 숨어있었구나. 노인도, 소년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삼독이 일궈낸 쾌재였다. 난 이제야 이들을 내 주변의 사람들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들도, 나도, 우리는 모두 청새치를 낚을 가능성을 가진 자라는 것을. 우리만의 여정과 인생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나이 들어도 변치 않는 눈만큼은 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나는 소년으로서 무엇을 배우고, 노인으로서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원문에 실린 노인의 배와 청새치의 그림


소설의 첫 문장은 그 중요함의 정도가 어마어마해서 소설가조차도 제일 마지막이 쓰기도 한단다. 즉, 독자를 사정없이 낚아버리는 치트키로 쓰이는 것이다. 결말을 품어버리는 첫 문장. 소설 전체를 끌어안아버리는 첫 문장. 그건 소설의 전체, 즉 결말이 나가가는 방향의 화살표를 독자의 마음에 걸어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건 바로, 작가가 소설을 머릿속에 구상하며 차 한잔을 우리는 방식과도 닮았는데, 찻잎을 고르고, 물의 온도를 맞추고, 시간을 들여 정성껏 우려낸 작품을 독자는 첫 모금에 찻잎의 품종과 우려낸 시간뿐 아니라 물의 성질까지 모두 느끼기에 그렇다. 예민한 작가는 예민한 독자를 대하는 방식이 예민하고, 그것을 아는 독자만이 작가가 곳곳에 심어놓은 작은 돌멩이들을 잘 주워 모을 수 있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그는 멕시코만류에 조각배를 띄우고 홀로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이 문장은 아예 밥을 떠 먹여 준다. 작가는 다 보여 주지만 우매한 독자는 쉽게 캐치하지 못할 뿐. 문장을 해체해 보아야 한다. 키워드를 찾았는가. 답을 말하기 전에 마지막 문장으로 얼른 달려가 보겠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소설가는 소설의 흐름을 '정靜과 동動'의 반복으로 구상한다면, 첫 문장은 노인의 일상을 표현하는 '정靜'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정靜은 움직임이 없는 상태, 기존의 일상, 일상의 한결같음 같은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노인은 그 자주 꾸던 사자 꿈을 다시 꾸고 있는데, 이 또한 '정靜'의 형태다. 일상의 잠은 고요하다. 그 사이 마련된 수많은 동動을 지나 노인은 결말에서 다시 정靜에 이르게 되지만 처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정靜이다. 첫 문장의 키워드를 여전히 궁금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홀로'에 있다. 노인은 항상 홀로 조각배를 끌고 바다에 나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인의 정靜은 첫 페이지와 두 번째 페이지를 거치면서 소년과 함께, 혹은 '따로'라는 동動을 거친다. ".... 처음 사십일 동안은 소년이 함께했다." 이내 '홀로'였던 노인이 소년과 '함께'로 옮겨왔다가, 이야기는 다시 정靜으로 흐른다. ".... 소년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다른 배로 옮겨 탔다." 사십일 동안 소년과 함께였던 노인은 소년의 부모의 만류로 인해 다시 홀로 배를 타는 사람이 된다. 이야기는 '정靜과 동動' 부지런히 오간다. 그 사이, 두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작가는 큰 힌트를 남긴다.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도록. "노인은 모든 게 늙고 오래됐지만, 바다 색을 닮고 활기와 불굴의 의지가 서린 그 눈만큼은 예외였다" 이 문장은 스포일러다. 이 노인은 대단한 것을 앞둔 사람이라는 작가의 떡밥이다. 운이 온다면 그 운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그의 눈빛에 담긴 그의 의지가 그것을 말해준다. 운은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이에게만 찾아온다. 그의 눈빛은 젊은 시절만큼 빛났다.


동動은 지반을 흔든다. 상황이 바뀌고 주인공은 보통 이즈음에 꼭 어딜 가거나, 다녀기도 한다. 홀로(정)였던 노인이 소년과 함께(동) 배를 타다가, 소년이 떠난 후 다시 홀로(정) 바다에 나간다. 평소처럼 다시 홀로가 된 노인은 다시 바다와 함께(동)가 되고, 다시 홀로(정) 돌아와 노인과 배를 타겠다는 소년을 만나(동), 다시 홀로(정) 잠이 든다. 그리고 그 옆엔 소년이 앉아있다.(동) 노인은 사자 꿈을 꾼다. (정+동)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는 정靜과 동動을 한 자리에 배치한다. 그것 또한 이미 암시된 바 있다. 11페이지(더클래식 버전) 즈음에 소년은 말한 적 있다. 그토록 노인과 배를 타고 싶어 하는 이유를. 노인과 사십 일간 배를 탄 적이 있던 소년은 노인조차 기억하지 못한 노인과의 사소한 에피소드를 모두 기억한다. 노인의 배려, 보호, 애정과 같은 소소한 조각들을 말이다. "전 다 기억하는걸요."


소설의 말미에 소년이 노인이 잡은 뼈만 남은 청새치 부리를 가지고 싶어 한 것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청새치에게 부리는 무기이고, 그 무기는 노인이 소년에게 준 것이다. 노인은 늘 홀로 사자 꿈을 꾸지만, 마지막 장면에는 노인옆에 소년이 앉아있다. 그리고 소년은 노인에게 여전히 배울 것이 있다고 믿으며,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도제관계, 즉 계승에 관한 서사다. 우리는 내게 귀한 것을 내가 제일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 싶어 한다. 노인은 바다에서 줄곧 소년을 대상으로 혼잣말을 해오고, 소년은 노인이 돌아왔을 때 울면서 노인을 돌본다. 주고 싶어 하는 자와 받고 싶어 하는 자. 홀로일 때조차 함께라고 믿으려는 자. 함께일 때 비로소 내가 되는 사이. 둘 사이에 꿈은 오가고, 사자는 어느새 노인에서 소년으로 옮겨간다.

노인의 이름은 산티아고, 소년은 마놀린.

스페인어로 '성 야고보'라는 의미의 산티아고는 고난과 이겨 싸우는 자, 그리고 소년의 이름은 히브리어 '임마누엘'에서 유래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나 이 둘의 인간적 유대와 희망을 제외하고도 마놀린은 고난을 이겨낸 성인의 정신적 후계자 역할을 자처한다. 고난의 사이마다 기억나는 필요한 존재, 그리고 고난을 이겨낸 귀한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어린 소년의 마음. 한 인생의 사그라지지 않는 의지와 이를 존경해마지 않는 계승자의 관계가 이름 속에 깊숙이 박혀있다. 이들의 묵직하고 웅장한 서사와 역사가 바다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동안 누군가는 해산물에 칼질을 하며 전망을 감상한다. 멀리 보이는 거대한 생선의 뼈를 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손님과 대강 아는 대로 지껄여버리는 웨이터의 대화는 노인과 소년의 이야기와 대조되어 한낱 먼지 같은 지껄임으로 흩어진다. 남의 일에 관심도, 흥미도, 깊이도 없는 우리네 대화는 웃음거리처럼 카메오로 등장한다. 나조차 그런 시각으로 이들의 서사를 읽었던 건 아닌지.


불굴의 투지로만 갈음되던 소설의 명장면이 노인과 물고기 사이의 사투를 제외한 영역에도 응큼하게 널려있다. 대놓고 보여주는 하수 같은 일을 헤밍웨이가 할리가 없잖은가. 숨겨둔 보석을 찾는 일. 소설을 읽는 일은 거기서 시작되어야 옳다. 노인이 85일째 날 배만큼이나 큰 청새치를 잡아온 것도 결국은 '더 멀리' 나아간 이유 때문이었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만큼, 평소보다 한 걸을 더 걸어본다면, 그리던 꿈은 이루어진다. 꿈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그 한 걸음에 달려있는지 모른다.


오늘의 소설 강독은 소설가이자 더클래식 출판사의 이수정 번역가님의 번역본과 그녀의 강독에 의한 내용이다. 소설번역가의 일은 고되고 심오한 사고를 요한다. 그 안에서 맥을 짚어야 하고, 기존의 시선에 동의하지 않는 자신만의 또렷한 그림이 있어야 한다. 이전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이는 많다. 소설의 번역은 중장비의 매뉴얼 같아선 안된다. 그 안에 작가가 숨겨놓은 보석가루를 주워 담아 보석으로 뭉치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 원어 표현을 한국어로 한국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하고픈 고민이 곳곳에 가득하다. 같은 표현이지만 같지 않은 의미로 쓰인 동사를 본다. 하여간 소설가도 천재이지만, 번역가도 소설가 못지않게 천재일 필요가 다분하다.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보면, 소설을 쓰는 자신을 바보 멍청이라며 겸손을 유지하지만, 나는 그것이 나 같은 우매한 독자를 위한 일이지, 결코 본인의 한계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혹은 안다고 젠체하는 이들에게 진실을 알게 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오래 쓰는 소설가가 나오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번역 또한 소설가가 할 수 있다면 했으면 좋겠다. 번역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원작의 묘미를 독자들이 여러 번역가의 책을 통해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무릎이 꺾여버린 경험은 삼독에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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