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하는 힘
동행을 따라 오랜만에 미용실에 와 봤어요. 주말 오후,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 사람들의 습한 날숨 냄새와 과열된 헤어드라이어 모터 냄새가 콧속으로 훅 파고듭니다. 크지 않은 공간에 손님, 헤어디자이너, 수습 직원과 원장님까지 빽빽하게 섞여 있습니다. 다들 머리숱도 빽빽하여 그것을 자랑삼아, 혹은 장난 삼아 형형색색으로 만들고 있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니, 나는 마치 놀거리를 하나 잃은 사람처럼 멍해집니다. 숯불갈비집에 앉은 채식주의자처럼 힘 빠진 눈으로 젓가락이 닿을 곳을 살펴보지만, 애초에 내가 올 곳은 아닌 듯합니다.
치료 후 머리가 다시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겨우 어깨까지 기른 머리카락이 요즘 들어 한 움큼씩 빠져나가요. 미용실에 가지 않습니다. 속을 알 리 없는 미용사가 힘을 주어 머리를 싹싹 빗을 것을 알고, 나는 남은 머리카락마저 놓칠까 안절부절못하며 울상 짓게 될 게 뻔하니, 그저 조용히 그 상황을 피하는 거예요. 머리카락도 그렇지만, 그 순간 상대의 무심함에 괜히 마음이 상하고, 얄팍한 돈벌이로 나를 여길 그의 속마음이 빤해서 지레 귀찮아질 것을 예상한 것이지요.
나는 칠이 벗겨진 나무 의자에 몸을 붙여 앉아요. 그리고 머리끈을 풀고 쓰윽 훑어봅니다. 이미 빠졌거나 막 빠지려던 머리카락들이 기다렸다는 듯 따라 나오네요. 오늘은 몇 개나 빠졌나. 머리숱을 솎아내지 않고는 안되던 시절도 있었기에, 그 시절의 더하기와 지금의 빼기를 어림해 보지만, 빼기의 속도가 얄밉게 더 빠른 것 같아요. 빠진 가닥을 헤아리는 스트레스가 다른 탈락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가벼운 게 뭐라고 나를 쩔쩔매게 하나 싶어 미련 없이 손을 탁탁 텁니다.
빠진 머리카락들을 들여다보면요, 그 안에도 시간이 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빠진 가닥들 속에는 서로 다른 생의 궤적이 담겨 있어요. 어떤 것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모낭을 뚫고 나온 아기의 배냇머리를 닮았습니다. 그 끝은 바늘처럼 뾰족하고 처음엔 실처럼 가늘게 두피를 뚫고 나오다가 점차 굵어지는 모양새를 띠지요. 중량감 없는 솜털. 신생아의 숨결 같은 보드라운 질감. 아직 자라지도 못한 채 빠져버린 그 짧고 여린 모발을 보면 나는 마음 한편이 아릿해집니다. 자연은 어린잎을 돋게 하고 진하게 물들게 하며 풍성하게 키워내는 성장 그래프를 그리지만, 그 상승 곡선이 이제는 내게 적용되지 않게 된 걸까요. 성장의 공식이 나를 비껴가는 것만 같아 그 미묘한 상실감에 자꾸만 손이 머리로 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진 머리카락들 중에는 조금 다른 결을 지닌 가닥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라온 머리카락으로, 적어도 한 번 이상 그 끝이 잘려나간 흔적이 있는 것이지요. 그 끝은 뭉툭하고 단단하여 마치 입대를 앞둔 군인의 삭발한 머리를 만지는 느낌을 줘요. 탄력 있고 생기가 넘치지요. 자랄 만큼 자라서 빠져버린, 이제는 휴지기에 접어든 그 모발을 보면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고 싶어져 야속함은 사라집니다. 누구에게나 휴식은 필요하니까요. 성장 곡선이 나를 비껴가는 했지만 쇄락 곡선은 잘 따르고 있군요.
누군가는 지금의 나를 보고 있다면 참 할 일도 없다 할 것 같네요. 그런데 진짜로 나는 미용실에서 할 일이 없어요. 나는 그저 명을 다한 모발에 대한 거룩한 제사를 치르고 있어요.
길게 뻗은 모발의 색이 점차 흐려졌다 짙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어쩌면 검은 색소가 밑천을 다하여 톤업이 되고 있어서일 거예요. 성질이 급한 것들은 이미 희어졌고, 가끔 어떤 것들은 투명하기까지 해요. 막 젊지도, 막 늙지도 않은 내 나이를 가늠해 봅니다. 나이보다 머리카락의 색깔이 시간을 추월하고 있지는 않은지 괜히 신경도 곤두세워보고요. 머리카락은 나를 너무 잘 알잖아요.
흰머리 뽑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쓸어내려진 머리털에 흰 것이 가끔 섞여 있으면 손 안 대고 코를 푼 것 같은 희열을 여전히 느끼긴 합니다만, 억지로 감추거나 들어내 버리진 않을 거예요. 갈 건 가고 남을 건 남아서 지금의 내가 되겠지요. 나는 아주 늙어서의 내가 궁금합니다. 거울에 문득문득 보이는 노화의 흔적이 신기해요. 나도 늙을 수 있구나. 알지 못한 능력을 깨달은 것처럼 설레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노화가 즐거워집니다.
흰 것이 달아난 자리에 흰 것이 자라고, 검은 것의 자리에도 흰 것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언젠가는 드러낼 검정의 바닥. 매장량에 솔직해질 겁니다. 정갈하게 손질하기만 한다면 그게 지푸라기라도 아름다울 거예요.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지푸라기로 어떤 짚신을 만들까 고민하지 않을 거예요. 그저 메마른 내 모습도, 세월의 흔적도, 미숙과 미완의 모습도, 다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니까요.
노인이 하루아침에 노인이 아닌 것처럼, 흰머리도 하루아침에 희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시간의 태엽을 감아보면 검정은 차츰 진회색이 되고, 다시 연회색으로 변했을 것이고요. 하양이 되어서도 하양의 여러 채도와 명도를 지날 것입니다. 머리 위엔 하양이 많아지고 검정이 줄어드는 페인트 공사가 한창인데, 내 안의 인테리어는 무슨 색으로 물들고 있는지 문득 골똘해집니다. 흰머리를 부인하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요. 나는 과연 희게 발효되고 있나 검게 부패하고 있나, 밝게 빛나고 있나 어둡게 은둔하고 있나. 미워하기보다 사랑하기를, 잊으려 하는 시간보다 그리워하는 시간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는지 자문합니다.
매일이 늘 똑같다고 불평하는 와중에도 이 얇실하고 가벼운 것이 자라고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촘촘한 모공을 밀고 나오는 박력도, 달아나지 못하게 잡아매는 구속도 실감할 수 없지만, 머리카락은 어느 틈에 자라고 길어져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밀어내고 길어지고 있겠지요. 모발은 갱신하는 자세로 그렇게 삶에 쉼 없는 모범을 보이고 있어요.
모발은 미루는 법을 모릅니다. 시간도, 색깔도 미루는 법을 몰라요. 그런데 우리는 미루는 법을 너무나 잘 알지요. 미루었던 일을 끝끝내 미뤄버리려면 우리가 애써 이 삶 속에서 몸부림할 일이 무엇일까요. 빠지더라도 최소한 자라 봐야 생에 대한 직무유기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겉으론 느긋하게 어슬렁대는 듯한 시간이지만, 언제든 미친 듯 달려갈지도 모르는 그 속도의 변속에 대한 대책은 있는가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 늦어져 있을지 모릅니다.
이미 희어버린 것을 쓰고, 회색빛으로 쉼 없이 빛깔을 달리하는 날들을 쓰기로 합니다. 그리고 아직 검게 남은 다행하고 감사한 날들에 펜을 세웁니다. 머리카락 DNA에 촘촘히 박힌 날들을 검은 폭포와 흰 포말의 언어로 풀어놓고 싶어요. 명주실에서 지푸라기까지 귀하지 않은 머리카락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감히 쓰지 않고 버려둘 날이란 존재하지 않지요. 숨이 붙어있는 한 너무나 소중해서 머리털처럼 지키고 싶은 것들을 기록하려 합니다. 떠나는 것들에게는 펜의 방식으로 미련 없는 작별의 인사를 건넬 것입니다. 온전히 간직하기 위해 온전히 떠나보내려 해요. 무게를 덜어낸 후에 성큼 다가오는 개운함과 다행감이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