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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오늘, 쓰고 있나요?

전업작가가 되어보려 해

by 엄민정 새벽소리

입국 신고서의 직업란 앞에서 잠시 멈칫합니다. 볼펜심은 ‘주부’의 마지막 모음을 채 긋지 못한 채 멈추고, 번지는 잉크를 응시하다가 나는 펜 끝을 돌려세워 적습니다.

작가!

마음을 들킨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오릅니다. 사각의 작은 용지는 그 글자가 담긴 사연도 모르고 여권 속으로 조용히 숨어들었습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묘한 부끄러움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따금 생각합니다. ‘나’에서 전업주부라는 역할을 걷어내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TV속 훌륭한 댄서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내 안에 용암처럼 분출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에요. 나는 백지 위에 자유자재로 미끄러질 수 있는 춤꾼이 되고 싶은 것뿐입니다. 사회가 정해놓은 역할과 통념이 아닌 나다운 정체성을 알고 싶어졌어요.

나는 누구지?

쉽게 답할 수 없던 나는 책을 한아름 담아 무작정 마음의 봇짐을 꾸렸습니다. 그 봇짐 앞에 마침맞게 멍석을 깔아준 것은 바로 브런치스토리였지요. 나를 맨 처음 작가로 인정해 준 이.


브런치스토리는 내 손을 잡아 '글'이라는 길의 입구에 나를 세워 주었습니다. 머뭇거리기를 습관처럼 여러 번, 통로를 탐색하는 눈길을 따라 조심스레 발을 내디뎌 보았지요. 색색의 얼굴들이 손으로 잡힐만한 거리에 즐빗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내 것이었던 적 없는 곱고 예쁜 언어들이 내 담장에 슬그머니 넘어와 나를 구경하네요. 나는 배고픈 강아지처럼 그것들을 덥석 물어 이리 깨물고 저리 핥아보며 장난을 쳤고, 내 손에 닿았던 것들로 금세 손바닥은 낯설고도 익숙한 온도로 데워집니다. 뜨거움이란 단어조차 잊었던 내 손이 어느새 끓는 찌개처럼 따끈하게 달아오릅니다.


느긋하고 느슨한 곳, 세상의 자극적이고 시끄러운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곳.

아마도 그때부터였지요. 순간을 붙잡아 길게 늘이고 그 위에 풍성하게 감정을 덧입히는 법을 알게 된 것이.


그 후, 나는 자꾸만 사소한 순간 앞에서 멈춰 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외면해 왔던, 표류하던 글감들을 하나둘 그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에 새로운 표현을 입히고 적당한 그릇과 부피를 허락하고 싶어졌거든요. 자유롭게 조합되고 탈락하는 글자 사이에서 희열과 비통을 겪는 창조자는 금세 인간의 시시한 겉옷을 벗어던집니다. 자칫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을 법한 것들을 다듬고 살리는 손은 백지와 만났을 때 가장 빛이 나고 성스러워집니다. 곱던 손은 집안일을 업으로 삼아 많이 거칠어졌네요. 혈관이 툭툭 불거지고 손톱도 정돈이 필요해졌어요. 밉게만 느껴졌던 이 손을 이제는 조용히 마주 봅니다. 나는 이 손으로 식구를 살리지만, 이젠 나를 길어 올리기 시작합니다.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에 잠들어 있는 기억과 상념들은 나만의 독보적인 재료가 되지요. 모든 지난날은 이제 자랑스러움으로 되살아납니다.

다짐합니다. 잠들어 있던 나의 목소리를 더는 재우지 않기로, 오히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 생각에 더욱 열을 내기로.


설거지는 미루면 쌓이지만 꿈은 미루면 멀어집니다. 꿈의 정의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간절한 것을 매일같이 누리면서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쌓여가는 글들이 그 무게만큼 나를 앞으로 밀어줍니다. 오늘 쓴 한 장이 더해지면 나란 전업주부는 전업작가에 한 발 가까워집니다. 나물을 무치고, 국을 끓이던 손에 펜이 마땅해 보이는 오늘입니다. 당신도 오늘, 꿈을 누렸나요? 아낀다고 아껴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증거를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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