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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의 말들

명배우의 명연기

위로는 서툴수록 좋다

by 엄민정 새벽소리
누군가를 마주할 때 그의 앞모습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은 그가 걸어온 길의 흔적입니다.
얼굴이란 침잠한 과거인 셈이죠.

이정훈 <위로는 서툴수록 좋다.>


이른 나이에 나를 낳은 엄마.

내가 아는 엄마는 늘 젊고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아이가 아이를 낳았으니, 그 삶에 그늘이 없었을 리 없건만, 생그러운 미소와 목소리가 그녀의 그늘을 감쪽같이 감추고 있었다. 어린 나는 그것이 엄마의 본모습이라 믿었고, 그 믿음이 오해였음을 깨달은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엄마, 허리 좀 펴."


걱정하는 건 엄마의 허리가 아니다. 그 말은 사실, 나의 당혹감이다. 싱그러움과 멀어진 표정,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 할머니를 떠올리는 키워드가 이제 엄마에게 겹쳐진다니. 이 여인은 정말 내 엄마일까. 그럴 리 없다.

삐뚤어진 등을 토닥이며 나를 곧게 세워주던 그 단단한 손길의 주인일 리가.


나는 그녀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있고, 그녀는 그것을 정확하게 안다. 뻣뻣한 어깨를 젖히고 고개가 들려지면, 시선은 자연스레 조금 위로 향한다. 높아진 시선 탓에 몸의 중심은 이내 무너져 뒤뚱하고 만다. 그 모습은 안쓰럽지만, 나는 그 연기를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엄마가 아직 젊다고 믿고 싶어 한다.


논길을 질주하던 우리의 자전거, 오이를 건네던 우리의 등산길, 그리고 나를 위해 뜨끈하게 차려진 엄마의 밥상. 그 모든 순간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남았을까. 그녀의 젊음이 가속도를 입어 시야 밖으로 달아나고 있다. 그 속도에 공헌한 것이 적지 않으면서, 책임질 수 없어 외면해 온 내 얼굴은 많이 비겁해졌다. 내 탓이 아니라는 듯 굽은 등을 나무라면, 그것마저 자신의 탓으로 받아버리는 늙은 얼굴. 이내 허리를 곧게 편다. 그리고 휘청한다. 마음이 흔들린다. 나의 중심이 흔들린다.


나마저 흔들릴까 자신을 곧게 세울 수 없는 몸.

당신이 곧 나였고, 내가 다시 당신이었던 시간.

내 등을 펴느라 침잠한 엄마의 등.


곧은 등은 연기로 꾸밀 수 있다지만, 굽은 등에 가리어진 젊은 날의 희생을 연기로 감출 수는 없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모정이고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연기도 자신보다 큼직한 존재를 품을 수는 없으니까.


엄마란 여인의 초깃값을 재설정한다. 젊은 엄마 아닌, 늙은 엄마.

당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껴안을 준비가 되었다고, 당신이 감추어온 그늘까지 사랑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주름진 손등을 늦기 전에 살살 어루만져 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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