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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독서와 산책

by 엄민정 새벽소리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말할 사람도 딱히 없어 말 그대로 '닥치고' 읽었다. 말이 잠잠해지면 책은 목소리를 냈다. 공허한 마음속에 책이 목소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 공간을 셈해보면 나는 아주 많은 책을 읽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책은 다음 책을 끌어왔다. 무한의 흐름에 나를 맡기면, 나는 어느새 책을 만져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 되었다. 약속장소에 일찍 도착했다던가,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생겼는데 집에 다녀오기에는 무리인 경우, 읽을거리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할 때면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가방 안, 책만큼 비어있는 공간을 재차 확인한다. 어쩐지 가볍더라, 뭔가 빠뜨린 것 같던 가방의 무게를 의자에 턱 내려두면 내 마음도 덜컹 내려앉는다. 손끝에 닿는 책장의 고요가 있어야 할 곳에 내 안의 소음이 자꾸 끼어든다. '너 잘 살고 있는 거야?' '저녁거리는 준비해 두고 이러고 있는 거야?' 잠잠했던 누군가의 목소리는 내 안의 날카로운 감시자의 것일 때가 많았다. 목소리는 고요의 가장 반대편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안다. 그 방향으로 갈수록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책이 없다는 건 나를 붙잡던 리듬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럴 땐, 책만큼이나 나를 지탱하는 것이 무엇일지 재빨리 생각해 본다. 그리고 막간이지만 나간다.


걷는다. 목적성이 없는 걷기. 나는 산책한다. 이것 또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을 때 하는 일이다. 가능하면 나무가 있고 물이 흐르는 곳으로 간다. 그건 단순히 눈이 편해지거나 마음이 평온해지는 이유에만 있지는 않다. 그곳에 가면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물 위를 가르는 새끼오리의 힘찬 도약이라던지, 잘려나간 나무 단면에 빨간약을 발라주고 있는 관리원을 본다던지 하는 일인데, 그러한 장면은 너무나 귀중해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눈꺼풀을 셔터 삼아 끔뻑끔뻑 사진을 찍는다. 눈앞의 모습이 믿을 수 없어 그러는지도 모를 일이다. 눈을 깜빡인 수로 사진의 장수를 계산해 보면 메모리카드가 부족할 만큼 찍고 더 찍었다. 무심코 나온 산책길에 어여쁜 광경을 보았다. 싫은 일은 흔하고 좋은 일은 드물다는 말습관이 부끄러워진다. 사는 일에 좋은 일은 없을 수 있어도 무엇을 붙잡느냐에 따라 좋은 일만 일어나는 삶도 있다.


말할 사람도, 특별한 목적도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했던 두 가지 일, 독서와 산책.

무심코 시작한 일이 내 삶을 지탱한다. 읽지 않고 걷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이건 이제 나의 정체성이다. 책과 산책, 이 둘에겐 대체 어떤 힘이 있어 사람을 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끌고 가는지.

오늘도, 책을 읽듯 길을 걷고, 풍경을 읽듯 사람을 본다. 이를 지속하고 있는 내가 문득 사랑스러워진다. 밤새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 있던 대학 시절, 왜 그리 내가 싫었는지,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불현듯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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