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중간광고 시간
말하자면 중간광고 시간 같은 것이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마지막 우승자를 발표하기 직전, 그 피 말리는 잠깐의 유예기. 축구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을 기다리며 잠시 관객들도 몸을 추스르는 시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어쨌든 넥스트는 있다는 말 아닌가. 이 판이 다 끝나지는 않는다는 말 아닌가. 그러니까 잠시 쉰다고 해서 너무 조바심을 내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빨리 다음 경기가 왜 재개되지 않냐고 재촉해서는 안될 일이다. 일생에 서둘러서 뭐 좋은 거 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15년의 시간 동안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지내다가 퇴사를 했다. 꽤 불안하게 살았었나 싶지만 사실 중간에 그만둔 것은 한 번 밖에 없다. 그것도 이직을 위해 면접까지 붙고 나서 마지막 채용절차를 기다리며 쉰 것이니, 사실상 불안한 퇴직은 아니었다. 어쨌든 재벌가 3세가 아니니까 앞으로도 돈은 벌어야 할 텐데, 채용시장은 얼어붙어있고, 나와 맞는 딱 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유명한 채용사이트에 올라온 공고들은 썩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차라리 남들 눈치 안 보고 프리랜서를 하면 좋겠는데, 프리랜서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프리랜서가 남들 눈치 안 볼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링크드인이라는 데도 가입해 보았는데 마음에 드는 자리는 죄다 영어 스페셜리스트들의 자리다. 이쯤에서 내가 원어민처럼 외국어를 할 수 있다면, 넷플릭스나 구글 같은 글로벌 기업에 도전해 보면 좋을 텐데. 유퀴즈 같은 데서 나와 인터뷰하는 4050대 멋진 여자 선배들이 그런 기업에 다녔던 기억이 난다. 나는 멋있는 여자선배들에 약하다. 나와는 닿을 수 없을 멋진 사람들. 그래서 멀리서 부러워만 했던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
사실은 건강만 생각하고 리프레시만 생각한다면 한 일 년쯤 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럴까도 생각하고 있다. 독립해서 회사를 차린 나의 멋진 친구 녀석처럼 나도 뭔가를 차려볼까도 싶지만, 나는 왠지 영업 쪽엔 소질이 없을 것 같다. 이쯤 되니 회사에서 주는 월급을 타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수익을 내고 생계를 유지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대단해 보인다. 유튜브에선 하루 글쓰기 10분이면 월 300만 원 수익이라며 호객행위를 하는 강사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거라도 해볼까, 예전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이제는 월 50 월 100, 경제적 자유, 안정적인 파이프라인 이런 말들에도 약간은 혹하게 된다.
사실, 15년이나 회사생활을 멈추지 않았던 건 사람이 좋아서다. 나는 재능 있는 나의 동료들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친구들이 가져오는 카피, 그림 한 장, 신기한 레퍼런스들, 반짝이는 아이디어, 재치, 이 모든 게 탐나서 매일 내 안에 담고 싶었다. 하다 못해 그림도 잘 그려, 글도 잘 써, 옷은 어찌 그렇게도 센스 있게 입는지, 말은 또 어찌 그렇게도 재미있게 하는지. 인생은 또 어찌나 열심히 살고 나에게 영감을 주는지. 건강관리도 잘하고, 인테리어도 잘하고, 여행도 좋은 데로만 잘 다니고, 하물며 인생 즐기는 것까지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나는 천성이 덕후인 셈이다. 사람 덕후. 물론 너무 시끄럽거나 감당할 수 없는 텐션의 사람들은 내게도 버거웠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광고회사 다니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조용한 걸 좋아하고 충돌을 싫어하는 나는 혼자서 하는 일이 맞겠다 싶으면서도, 이렇게 사람들을 좋아하는 데 사람들 안 만나고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결국은 다시 도돌이표다. 돈은 벌어야 하고. 사람은 만나야 하고. 쓰는 일은 여전히 나에게 즐겁다. 하지만 이번엔 한 가지가 다르다. 중요도가 달라졌다. 내가 가장 잘 쓰일 수 있는 일을 찾을 것이다. 어려워도 어떻게든 찾을 것이다.
중간광고가 끝나도 나는 결국 서바이벌의 일등은 안 됐겠지만, 여기까지도 꽤 많이 왔다 싶다. 매 라운드가 서바이벌이라 나 같은 심성의 사람에겐 힘겨우면서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 즐거웠는데 이제 새 곡을 만들 힘이 다 떨어졌다. 곳간이 떨어졌으니 채워야 한다. 그게 건강이건 에너지건 크리에이티브건, 나는 부지런히 지금부터 채우려고 한다. 그래야 다음 스텝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쓰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자기 안의 표현도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작가 켄 윌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