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el Duchamp, <Fountain>, 1917
마르셀 뒤샹은 1917년, 뉴욕 독립미술가협회전에 도발적인 작품 한 점을 출품한다. 상점에서 구입한 하얀 도기 재질의 남성용 소변기에 ‘리처드 머트’라는 예명으로 서명을 남긴 뒤, ‘샘’이라 이름 붙인 작품이었다. 이제껏 본 적은커녕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작품을 맞닥뜨린 전시 위원회는 난감해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작품’이라 할 수 있는지 따져 보던 그들은 결국 해당 작품이 신체 노폐물과 관련되어 있으며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등, 이런저런 이유를 더 덧붙여 전시에서 제외한다. 위원회에서 이 작품을 지지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는데, 그의 의견은 이러했다.
“리처드 머트 씨의 작품을 통해 예술가의 선택적 행위와 의도가 예술 작품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평을 내놓은 것은 마르셀 뒤샹 본인이었다. 다다이즘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당시, 뒤샹이 이사로 있던 뉴욕 독립미술가협회는 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 주기 위해 전시를 기획했다. 입회비 1달러에 참가비 5달러만 내면 누구든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던 그 첫 전시에, 뒤샹은 <샘>을 출품했다. 새로운 미술을 부르짖는다는 위원회조차 자신의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비웃듯 위원직을 사임해 버린다. 이 일화가 알려지면서 다다이즘 운동가들은 목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 잡지에는 이런 글이 실리며 화제가 되었다.
“머트 씨가 <샘>을 손수 제작했는가는 중요치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삶의 일상적인 물건을 골라,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을 붙여 유용성을 제거했다. 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창조한 것이다.”
‘유용성을 제거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 흔히 사용하는 제품에서 ‘유용성’을 제거하고 새로운 제목과 관점을 붙여 새로운 사고를 창조한 행위가 하나의 제품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했다는 주장이다. 이전의 전통적인 예술이―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백지에서 의미를 창조해 나가던 것이라면, <샘>이라는 작품은 일상의 제품에서 유용성을 제거해 의미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하나의 대상에서 쓸모를 제거하면 우리는 그 대상의 의미를 사고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면 그것은 예술이 되고, 별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쓰레기로 취급된다. 현대 미술이 수십 년간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유도 상당수의 작품이 예술과 쓰레기, 이 양극단 사이에서 가느다란 외줄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예술가만의 몫이 아니라 일정 부분 관객들의 몫이 되기도 했다. 예술로 받아들이거나 쓰레기로 취급하는 문제는 관객들에게 맡기고, 예술가들은 그저 묵묵히 쓸모를 제거하거나 쓸모없음을 창조해 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받아들임의 태도는 현대 미술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에 적용할 수 있다. 매일 작동하던 노트북이 먹통이 되어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 현재를 살아나가는 데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과거의 어떤 일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자각할 때, 매일 출근하던 가족이 정리해고 당해 집에 들어앉아 있을 때, 우리는 쓸모를 제거당한 대상에게 우선 당황하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쓸모를 부여하든 의미를 부여하든 곧장 내버리든 곰곰이 생각하다 내버리든 그것은 사람 나름이고 상황 나름이겠지만, 어쩌면 예술적 사고란 ‘받아들임의 시도’라는 아주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예술을 손쉽게 쓰레기로 치부해 버리지 않고, 신중히 사고하고 또 사고해 보는 과정은 언젠가 우리 삶에서 맞닥뜨릴 여러 ‘쓸모없음’에 관한 좋은 연습이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