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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의 마침표

알량한 자존심과 겸손

by 지안

두 달 가량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듯 많은 생각들을 들고 떠난 여행.

여행지에서 훌훌 털어버리고 온 생각들도 많지만, 무겁게 돌아온 생각들도 있었다.

그리고 꺼내보지도 못한 생각들도 남았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우려했던 것처럼, 현실로 돌아오는데는 꽤나 괴로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도피하듯 떠났던 여행이어서 더 그랬던걸까.

그럼에도 확실한건, 작고 소소한 여유를 느끼며 답답한 마음은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짐처럼 들고갔던 생각들은 정리되지 않았어도, 마음은 오히려 편해졌다.


그런데 슬프게도, 돌아온 이 곳은 아수라장이었다.




현명한 사람은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데,

좁고도 좁은 나만의 세상에서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 바빴던 나는 내 세상에 무심했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관심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삶의 모든 순간에 정치가 관여하고 있음이 와닿았다.

아는게 없어서 어떠한 견해도 없었던건데, 바보처럼 치우치지 않은 내가 건강한 중도라고 생각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은 본인이 어리석은 줄도 모른다는데, 내가 그랬다.


어리석게도 생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나서야, 아수라장이 된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이 나이 먹도록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창피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많으니 이제라도 알아보자라는 생각으로 이런 저런 내용을 찾아봤다.

어쩌다보니 밤새 온갖 정치 뉴스와 정치인들의 발언들로 가득찬 영상의 파도에 압도되어가던 중,

생각지 못하게 다른 포인트에서 내 뒷통수를 맞은 듯 한 깨달음을 얻었다.




"좋은 대학 좋은 과를 나온건, 19살 딱 그 때에 공부를 잘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6살에 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있다면, 25살에 본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금 바꾸어서 적었지만, 이러한 뉘앙스의 내용이었다)


'나는 목표를 이루고 나면 한동안 번아웃처럼 멍한 상태에 빠진다'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을 쓰던 당시의 나는 이렇게 반복되는 번아웃이 일종의 보상심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인지 스스로도 모르지만 그저 다음 목표까지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나는 그저 목표를 이룬 순간의 기쁨과 나의 모습에만 취해있었던 것 아닐까?

작고 알량한 자존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 뿐 아닐까?

그 순간에 시험을 잘 봤을 뿐인건데, 너무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살았던 것 아닐까?


이러한 순간들이 나를 겸손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나서도 겸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공부하고 나아가야 했는데,

난 그저 합격한 내 자신, 이 직업을 가진 내 자신에 취해서 제대로 된 노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게 아닐까 반성하게 되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 수많은 날들 중 하루일 뿐이다'

수 십번은 들었을 이 말들이 새삼 진정 와닿아 이해되었다.

인생이 뭔가를 이루었다고 끝이 아닌데, 적어도 나라는 인간은 너무도 쉽게 오만해져 자만하고 말았다.


나의 작고 알량한 자존심은 나를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잣대를 들이밀고 사람들을 평가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무시하기도, 견제하기도 했다.

이런 마음은 너무도 쉽게 투영됐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거라는 피해의식으로 살아갔다.

내가 속한 곳이 너무도 버거운 상황과 공간이라며 탓해왔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다른 사람도, 환경도 아닌 내 자신이었다.

추잡스럽게 거만한 마음, 왜곡된 사고, 그리고 겸손하지 못한 태도였다.


정치에서 시작해 뜻하지 않게 큰 깨달음을 준 하루.

말 그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끄적여본 글.


그저 쉽지 않은 어제와 오늘,

나에게도, 모두에게 더 나은 내일이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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