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얼굴이 커서 모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모자는 얼굴이 갸름하고 예쁜 사람만 쓰는 거라는 생각에 챙 넓은 모자만 20년 넘게 쓰고 다녔다. 10여년 전 부산 해운대에 살던 때의 일이다. 남편이 사업을 정리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집도 팔고 월세 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해운대 성가정 성당에서 바자회를 한다기에 끝날 무렵에 구경을 갔다. 부자 동네라 그런지 예쁜 모자가 여러 개 있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챙 넓은 모자, 푹 쓰는 벙거지 모자 등등. 하나에 무조건 500원이란다. 나는 버리는 셈 치고 갈색 뜨개질 모자를 하나 500원을 주고 샀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부자 동네 바자회라 물건이 좋았는데. 호호. 더 사둘 걸 아쉬운 마음이 든다.
부산에서 창원으로 이사 올 때 짐을 정리하며 그 모자를 챙길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이후로는 까먹고 지냈다. 몇 년이 지나고 운동 삼아 동네를 걷는 중에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나도 운동할 때 쓰는 따뜻한 모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 싶었다. 그렇다고 새로 사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 가서 살그머니 써보면 크기도 작고 가격도 비싸서 내려놓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에 문득 오래 전 그 털모자가 떠오른 것이다. ‘아 참. 500원짜리 털모자가 있을 텐데...’
집으로 돌아가 장롱을 뒤져서 그 모자를 찾았을 때의 기분은 정말 기뻤다. 크기가 커서 좋고, 털실이라 따뜻하고, 색깔도 변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남편이 모자를 쓴 내 모습을 보고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다. 모자를 쓰면 머리가 나지 않는다고 해 걱정도 했지만 쓰면 따뜻하고, 머리숱이 줄어들어 뒷잔등이 훤히 보이는 나에겐 딱이었다. 그 후로 그 모자는 선글라스와 함께 가방 속 필수품이 되었다.
얼마 전 남편이 대구에 있는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어김없이 털모자를 꺼내 쓰려고 하는데 매일 쓰고 세탁하다 보니 모자가 힘없이 늘어나 눈썹까지 내려왔다. 덕분에 그날 아침은 남편과 함께 귀여운 실랑이를 벌였다.
“여보! 모자 안에 귀 좀 넣어주세요. 모자를 줄여 봅시다.”
내 말에 남편은 이리 땡기고 저리 붙이며 간단히 수선을 했다. 그랬더니 모자가 다시 잘 맞았다.
“됐네요. 올 겨울에는 쓰겠어요.”
내 말에 남편과 나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소확행이 이런 걸까? 즐거워했다. 대구에서 병원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시간이 남아 역 바로 옆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에 들렀다. 나는 무심코 매장들을 지나치는데 남편이 1층에 있는 한 모자 코너에 들어갔다. 남편은 첫눈에 잡은 모자를 들고 나에게 이리 씌우고 저리 씌우고, 돌려도 보았다가, 다시 씌워보고, 뒤집어 보기도 하더니 내가 말하기도 전에 계산대 앞에 섰다. 가격표를 보니 10만원이 훌쩍 넘었다. 마트에 가면 2만원짜리도 간 떨려하며 다음에 사겠다고 자리를 떠나는 나에게 그 날 남편은 다독이듯 말해주었다.
“모가 들어있어서 따뜻하겠네. 이 모자는 앞으로 10년 쓰면 돼. 잊어버리지 않으면 평생 쓰는 거야.”
그렇게 꽃이 달린 어여쁜 갈색 모자가 내게로 왔다. 요즘 나는 이 모자와 늘 함께 한다. 남편의 말대로 모가 들어있어 따뜻하고 모양이 예쁜 것도 마음에 들지만, 그것보다는 이 모자를 나에게 사주고 싶어 한 남편의 깊은 마음을 알기에 더 없이 소중하다. 나는 오늘도 남편의 마음을 쓰듯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간다. 남은 평생 나와 함께하게 될, 내 인생 가장 특별한 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