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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롱불 Oct 12. 2024

아버지의 일기(사랑)

아버지의 사랑

어느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젊은 시절 쓴 일기 비슷한 글을 발견하였다. 1941년생이신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경험하셨고 그 이후에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한국사회의 한복판에서 많은 어려움을 체험하셨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하소연할 곳이 없으셨는지 가끔 글로 마음속에 담은 속내를 풀어내시며 스스로 위로를 받으셨던 것 같다.

또박 또박 정갈한 필체로 쓰신 글에서 아버지의 어려운 삶이 엿보이지만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돌아가셔서 물어보거나 위로할 수도 없어 아버지의 글을 타이핑 해보는 걸로 아버지의 삶을 조금이나마 공감해 보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보고 싶다.     

*에피소드 1 –객지에서의 병과 회복 

 이발을 했다. 머리가 아픈 다음부터는 시장기가 들으니 가슴이 절이기 시작한다. 아픈 가슴을 움켜잡고 집에 저녁을 먹으면 괜찮을 것 같아 먹었지만, 더 심한 열이 나고 가슴은 무진 아프만 갔다. 누워 생각하니 이러다가 정말 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려운 생각이 들어,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신이 좋았다. 생각끝에 하는 수 없이 누나 “500환만 주시오” 하니까 “아니 어디가 아프면 말을 해라” “약을 지어다 줄게“. ”내가 다녀오겠으니 저에게 주십시오“ 하니까 누나는 얼른 500환을 주면서 ”같이 갈까?“ 했다. ”아니 혼자 가겠습니다“. 이때 시각을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약방은 거의 문이 닫은 것 같았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아픈 가슴 움켜지고, 시내로 나올 때 생각하니, 정말 설움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죽느냐?. 사느냐?. 문제에 도달했을 때, 내가 이대로 죽어가면, 그리운 부모 형제를 만나 보지 못하고, 죽는구나 생각할 때 자꾸 마음이 서글퍼만 갔다. 

 그래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인생이다. 정말 객지에 몸이 아프면 어느 누가 위로의 말 한마디 해주는 이 없고, 다만  생각하면 한탄이 나온다. 

가슴을 움켜안고 약방에 왔을 때 약방은 문을 닫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문을 두드려렸다.” 실례합니다! 서너번 하니까 잠시후 문이 열리며, 주인같은 분이 나오셨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약 좀 살려고요~~“

 어데가 아파서 그러십니까? 지금 몸이 많이 아픕니다. 어데가요? 가슴이 져미며 머리가 아프고 열이 심합니다. 네 그래요.  

 아저씨는 ”이 약을 끓여 마셔요?“했다. “내 약값이 얼마 되시죠?” “300환입니다”. 500환을 주니 200환을 거슬러 줬다. 그러는 그때 마치 약방옆에 형님이 식당을 하고 있는데 더욱이 용이했다. 거기 찾아가서 “어서 오게”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형님이 물었다. “집에서 몸이 아파서 나왔다”고 했다. 형님이 내 얼굴을 보면서 하는 말이 “이리 해보소“하는 말에 팔목을 만지면서, 이거 채독기(채소를 날것으로 섭취하여 생기는 질병)같은데, 채독이 있는 사람은 열이나고 손발이 차다고 하면서 말했다. 정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정말 채독이라면 나는 죽는다. 살 수 없는 마음이 상상되었다. 그래 역시 열은 고열이었다. 심부름하는 애에게 “이걸 좀 데워 주오” 하니까 약을 끓여서 달여 왔다. 그래서 가루약을 타서 마셨다. 마신후 열의 도수가 떨어지며 이젠 숨결이 가벼워 졌다. 이젠 살 것만 같았다. 형님에게 ”제 얼굴이 좀 어떠냐니까?“ 하니까 ”아까보다 열이 떨어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속은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았다.

형님,미안하지만 여기서 밤을 세워야 되겠습니다.그렇게 하도록 해서 “여기서 자고 몸이 회복되거든 가기로 해”하면서 친절히 대했다. 그래서 하룻 밤을 형님네 집에서 자기로 했다. 어느덧 아침이 되었다. 아침 일찍 매형이 와서 “집에서 자지 왜 여기서 잣느냐?” 하면서 집에 가 식사를 하도록 했다.    

*에피소드 경찰서에서 하룻밤  

 이튿날 시내에 나왔다. 때는 마침 419혁명(1960.4.19.)이었다. 오다가 술집에 들어가 내가 술 한 되를 받았다. 그때 계엄령이 내렸다. 다리를 막 건너오니까 “손들어” 하면서 군인이 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손을 안 들고 있었는데, 형님이 옆구리를 치면서 말하였다. 그래서 손을 들었다. 차에 타고 경찰서에서 내렸다. 거기는 광주 경찰서였다. 경찰서에서 수사계로 넘어갔다.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만 온 줄 알았더니 한 200명쯤 와 있었다. 다음에는 주소 성명을 적고 도민증을 검사하였다. 주소 성명을 적은 다음 도민증을 보자고 하더니 도민증은 이제 신청했다고 하니까, 그러면서 제 자리에 돌아가라 하였다. 그날 저녁은 뜬눈으로  하룻밤을 수사계에서 자게 되었다.

여기 자는 사람들은 신사숙녀 할 것 없이 먼지투성이다. 옷은 먼지발에 젖은 것고 같았다.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날이 훤히 밝아도 감감 소식이 없었다.

오전 10시가 넘고 열시반이 되자 몸집이 큰 거인이 나왔다. 시선이 집중했다. 서장인가 했다. 조사계 주임 안내로 연단에 올라 선 다음 전부 호명했다. 질서정연하게 세워놓은 다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 하룻밤이지만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나라 일을 잘하면 충신이고 못하면 역적이란 말이 있습니다. 학부형 여러분께 알립니다. 

 요사이 학생들이 공부나 할 따름이지 정치에 무슨 간섭을 하여 데모를 하는 것입니까? 학생들 가지고 계신 분들은 잘 타일러 밖에 출입 못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하며, 요새 죽는 것은 개 죽음이니  잘 생각하시라는 말을 거듭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렇게 해산에서 나왔다. 

매형집에 갔다. 누나가 “왜 인제 오냐?” 했다. 늦은 이유는 통행금지 위반자라 해서 수사계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어머나!. 고생했구나” 하면서 아침을 내 주었다. 그래도 먹는 아침밥이 반갑지 않았다.     

*에피소드3-힘겨운 직장생활(20세 시절,1960)

 나도 그때(아버지 사고이후) 부터 직장 일자리를 구했다. 처음은 식당이었다. 식당에서는 몸 튼튼히 좋았다. 주인의 꾸지람을 듣고 운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할 때 맥없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나오게 되어 서울로 떠나게 되었다. 어머니께 돈 7천 환을 타가지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서울 이종 형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종로 가는 버스를 타고 종로5가에 내렸다. 이화동을 찾아갔다. 형님이 무척 반가이 맞이하였다. 그런데 취직은 일찍 안 되었다. 그때 마치 집에서 편지가 올라왔다. 그 이튿날 차비를 해 줘서 내려왔다. 집에서 며칠 쉬고 있으니까 목포에서 오라는 편지가 왔다. 그래서 유리점에 취직되었다. 취직을 하기는 쉽게 했으나, 주인이 무척 성질이 나빴다. 조그만 일에도 신경질을 냈다. 유리 점에서 1년이라는 세월은 정말 쉽게 흘러갔다. 유리점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 거기에서 다시 나왔다. 조금만이라도 좋은 데를 구하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취직은 단념하고 집에 있었다.

 때는 이른 봄이었다. 형님은 나주 문평면에 가서 현장에서 하루에 600환, 800환을 번다고 했다. 그래서 저도 형님과 같이 일을 며칠 다녔다. 그래서 15일 동안의 2,500환을 벌었다. 정말 많이 번 샘이었다. 이튿날 저는 현장으로 가고 형님은 집에 있었는데 한참 동안 일을 하고 있으니까 형님이 넘어오셨다. 형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불렀다. 나는 궁금해서 가까이 가서 형님 말을 들었다. 그러니 형님은 광주로 이사한 매형께서 오셨다고 하셨다. 너를 데려다가 광주에 있는 계림극장에 취직을 시켜준다고 해서 너를 데릴러 왔다고 했다. 그러한데 돈 30,000환이 필요하였다. 벌써 밥먹기도 힘든데 그 돈은 어디있어? 우리 살림은 빈곤했으나, 돈 빌려주는 데는 말만하면 되주는 사람이 있었다.

 돈은 구할 때가 많았지만 1화 2환 이어서 많은 돈이 필요해서 명산 이모네 집으로 가서 돈을 꾸어왔다. 돈 3만환 가지고 광주가는 저녁 막차를 탔는 데, 밤 10시였다. 봄비와 같이 전등불은 깜빡 깜빡하였다. 누나네 집에 갔는데, 할머니와 누나가 주무시고 계셨다. 내가 들어가니 누나가 곧장 일어나셨다. 누나에게 인사를 하고 집안 소식을 말하였다. 이튿날 모르던 스님이 오셨다. 매형 형님이었다. 그래서 내가 인사드리고 매형이 형님이라 부르라고 하셨다. 그래서 형님이라고 불렀다.

 아침을 먹고 시내에 나가서 박병로를 만났다. 내일부터 빵공장에 우선 다니면 주일내로 전기공장에 취직된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공장에 가서 보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당시 누나의 살림살이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식구가 굶주림의 고통을 많이 받았다.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 물으니 1급 하루 200환! 정말 박한 일급이었다.

이런 일을 해가지고는 정말 굶어 죽기 마련이고 희망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이유는

밥값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만 둘려고 하였으나 거기서도 임시 다니다가 좋은 사장을 만나서 좋은 공장에 취직하도록 하여라. 그래서 다니기 시작했다. 공장으로 취직은 되었으나 거리가 삼길요는 되었다. 누나의 고생도 많았지만 내가 있으니 방도 단방에 좁디 좁아서 곧 병에 걸릴 것만 같았다.

 아침 먹고 벤또(도시락)를 싸 달라 해서 공장에 오니 작업이 시작되었다. 선배들에게 인사를 나눈 다음 작업을 시작했다. 점심 때가 되어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벤또를 열어서 보니 보리에다 조를 섞었기 때문에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도 챙피를 무릅쓰고 먹었다. 하루 일과는 끝났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는 항시 고민이란 두 글자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내가 다니고 있는 이 공장은 아무리 생각해야 희망이 보이지 않고 막연하기만 했다. 그럭저럭 다닌 것이 69일이 되었다. 

 어느 날 박가가 와서 하는 말이 “일 잘 하느냐?” 해서 “예, 여기서 잘하고 있습니다.” 인사를 하고, “거기 취직 자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곧 된다“ 했다. 그러면 둘이 약속을 합시다. 박가가”약속은 무슨 약속이냐?“ 말을 해 봐, 해서 내가 “이달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새달부터는 저 공장에서 일을 하게해 주십시오” 하니까 박가가 “아무 문제 없어, 일이나 착실히 하고 있어”말했다. 나는 “만약 약속을 어기면 모든 것을 단념하고 돈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했다. 박가가“ 좋아”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 공장은 재료가 안 들어와 쉬는 것이 일쑤였다. 그때 모이동시기라 모심기에 바빴다. 남의 모를 몇 차째 심었다. 하루에 100환도 벌고 600환도 벌었다. 나무도 두 번 했다(채취). 나무 한다기 보다 소풍 구경이 더 즐거웠다. 무등산은 정말 웅장했다. 나무도 많고 고목도 많았다. 포수 따라다니면서 일했다. 집에서 보다 못한 일도 많이 했다. 어느 날 공장에 와서 보니 일은 안했다.      

*에피소드4- 가족의 병 회복과 뜻밖의 아버지의 사고

 동생들은 나를 보고 인상을 쓰면서 ” 아버지 죽겠다 “고 이리궁글 저리궁글 야단이었다. 이태약방 할머니가 들어오셔서 머리에 열이 난다고 하면서 수건에 찬물을 적셔 머리에 얹어 주었다. 잠깐 동안 괜찮았으나 또 열이 심하였다. 어디가 아프냐고 했다.

배가 아프다고 했다. 그때 약방 할아버지 집에 가서 조의원을 불렀다. 동생이 아프니 빨리 오셔서 좀 봐 주시라고 했다. 조의원이 오셔서 팔을 주물러 보시더니 “매우 열이 많구나”하셨다. 침각에서 침을 내어 동생에게 찔렀다. 한참 있다가 “이제 좀 어떠냐”고 하니까, “괜찮다”고 하였다. 나는 정말 신통하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동생도 겨우 생명을 잃지 않게 되었다.

 전 가족이 병중에 시달리다 이제 겨우 병자리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는 여기 생각하기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나는 무엇보다도 건강이 제일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병 중에 시달린 우리 가족은 정말 힘이 없었다. 부모님께서 하늘이 자식을 주셨다고 하시면서 굶주림에 시달린 누런 얼굴 빛을 보이면서도 “예쁘다” 하시면서 미소를 지의셨다.

 무더운 삼복 시절은 다 가고 바람 살랑 부는 가을도 가고 겨울철이었다. 아버지는 품팔이로 가셔서 남의 지붕을 이다가 사다리를 잘못 밟아, 그 밑에 바닥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당시 운명을 하셨다가 또 다시 살아나 집에 와서 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불안한 가족 식구들은 모두 아버지의 병환을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다. 아버지가 “내가 없더라도 너희 삼형제는 괜찮을 것이다” 말씀하셨다.

 나는 무척 괴로웠다. 옆에 계신 어머니는 어린 것들을 놔두고 안 된다고 하시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치료를 열심히 하여 6개월 후에 밖에 출입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꼭 죽을 것인데 살았으니, 앞으로 우리는 살 날들이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그때부터 형님은 남의 집에 살라고(일하러) 가게 되고,나도 인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꿈꾸고 있었다.     

*에피소드5- 가족들의 장사

 겨우 그날 그날 생명을 이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이듬해 부터는 살기가 더 부드러웠다. 또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형님께서도 국민학교를 졸업하시고 나이는 어리지만 장사에 소질이 있었다. 열차에서 감시원이나 차장이 보지않게 몰래 장사를 하기 때문에 대단히 힘들었다. 그나마 보기만 하면은 인상을 쓰면서 패서(폭행) 가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맞기도 하고 물건을 발로 밟는 때가 많았다. 매도 많이 맞았다. 형님은 장사를 하며 배가 고파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도 먹지않고 저금하는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쥐꼬리만한 미천을 도망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지만 안만해도 이런 장사에도 외상이 있기 때문에 미천이 줄어들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이럴 때면 남는 게 없다고 하시면서 안색이 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식구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다. 이것도 안 하면 밥을 굶는다 하셨다. 적은 장사지만 힘이 무척 들었다. 집(몽탄)에서 망운이나 현경까지 40리나 되니 고생이 많았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나무와 고구마를 사오는 것이 직업처럼 되었다. 오직 건강의 힘으로 우리 여섯식구 살기는 부드러웠다. 어머님께서는 미천이 없으니까 장사를 못 하겠다 하면 형님이 굶주린 배를 움켜지고 100환, 200환 저금한 돈을 어머니 앞에 내놓으면 어머니는 대단히 기뻐하신다. 이럴때면 우리 집엔 웃음꽃이 핀다. 국민학교를 졸업(1954.13살)한 후 나도 아버지를 도와서 부지런히 일했다.                                                                       

에피소드6- 무안 고모집 일꾼으로 가서 돌아옴 

 어느 일기 고르지 못한 봄날이었다. 그날도 흙을 파서 짊어지고 있는데, 무안서 중근애가 와서 “집에서 일하는 애가 집을 나갔는데, 할머니가 오빠를 데리고 오라고해서 왔다“고 말하였다. 내일 장이니 오늘 가자고 했다. 마음은 기뻤으나 집을 나가기가 싫었다. 옆에 계시는 어르신들이 잘 되었다 하면서 집에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하면서 ”넌 좋겠다“ 하였다. 작업을 끝마치고 내일 가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께서는 ”너 무안 가거라” 하면서 “거기에 있으면 괜찮다“ 하였다. 나 어린 마음으로 그럴지 모르고 집을 떠나기가 무척 싫었다. 어머니 “안 갈래요”하니까. 거기는 다른 데와 달라서 대우도 더 나을 것이다. 하면서 권고했다. 아버지께서는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좋다고 주장하시며 “가거라” 했다.

 이튿날 잠을 자고 일어났다.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니 정말 슬펐다. 점심을 먹고 옮기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억지로 재촉했다. 아버지가 멀리까지 보내 주시면서, “못 있겠으면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예“ 하고 돌아설 때, 내 눈에서는 쉴세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는 내가 안보일 때 까지 자꾸 자꾸 돌아보시면서 묵묵히 보고 계셨다. 무안에 도착해서 고모집을 찾았다. 고모가 “오 잘왔다” 하면서 저녁을 준비해 지어 주었다. 집에서는 보리밥도 맛있었는 데 어쩐지 쌀밥에 고기를 주어도 밥생각이 없어 안먹었다. 그리고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목이 말랐다. 정개로 가서 물을 먹으로 갔는데 중근에 한번도 보지 못한 개집애가 무슨 일을 바쁘게 하는 양인데 고개를 짜웃하면서”물 좀 주쇼“ 하니까”거기 물이 있으니 떠 잡수쇼“ 하니까, 물은 실가리가 섞인물, 깨끗한 물이 없었다. 그때 목이 말라 하는 수 없이 그 물을 마셨다. 그리고 있으려니까 한번도 보지못한 남자가 나와서 왜 물을 안떠주냐고 했다. 너 이리 좀 다가오라 하더니 무슨 말을 주고받고 했다. 어떤 여자 물어보니까 자기 오빠라고 했다. 그런데 모두가 꿈이었다.

 아침 세수를 하고 생각했다. 밥 생각도 없었다. 오늘은 어머니가 무안 장에 오신다고 해서 어머니가 오시면 따라 갈 예정이었다. 방에 들어가 있을 때 밖에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어머님 인 줄 알고 내다 보면 딴 아주머니들 이었다. 한참 있으니까, 어머니가 8시쯤 되면서 삽 한 자루를 사 가지고 오셨다. 어머니가 “너를 데리러 왔다.”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는 너를 보내고 얼마나 운 줄 아느냐“ 하셨다. 

 무안 고모집에 갔다 오면서 부터 머리가 아프면서 몸이 불편하더니 이삼일 후에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때부터 열이 오르고 정신이 아찔했다. 금시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당시 서울서 사시는 조의원이 마을에 있었다. 조의원의 도움으로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며칠안가 나는 회복하게 되었다. 또 불행이 닥쳐왔다. 집안 식구가 다 아프고 어머니 혼자만 괜찮다 했다. 정말로 조의원 의술은 놀랄만 했다.                                                                  

*에피소드7- 외숙의 재산 강탈시도와 가족의 고초

  만주로 피난을 간 외삼촌(외숙)께서 혼자 돌아오셨다. 어머니께서 “혼자 오냐”고 물으니까. 다음 차로 처와 조카들이 온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외숙이 집과 밭을 주시라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집과 밭은 동생에게 필요 없네. 어머니께서 여기 오시면 몰라도, 안 오시면 못 주겠다하셨다. 이 집과 밭은 3년 전에 서갑진씨(매형)가 사기로 했다. 다음 날 저녁을 마치고 있는 데, 여러 외숙들이 오셔서 집과 밭을 밀어주소, 자네는 일을 해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니 하고 부탁을 했다.

 무식한 아버지는 대꾸를 안 했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집과 밭은 우리의 생명이니 욕심 나거든 우리 여섯식구 자는 틈을 타서 목을 자르고 가져가요!” 하니까. “그럼 우리 반반으로 나누세“했다. 가져가려면 전부 가져가시라고 했다. 어머니는 안 된다고 주장하셨다. 그날 밤 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이튼 날 이웃에 사시는 문택씨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모략을 하고 있으니, 집과 밭 없어도 사니까 다 주라고 하였다. 만약 안 준 경우 식구가 다 절멸한다고 말했다.

 밤이 돌아왔다. 행만 형님께서 “아버지가, 작숙하고 고모하고 오라”고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수를 업고 갔다. 철 모르는 삼형제는 부모가 돌아 오기를 기다렸다. 1시간이 경과되서 어머니는 눈을 싸고,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이 다치신 데 없냐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부모님을 볼 때는 눈에서 눈물이 고여있고, 가슴을 보니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 가슴을 본 삼형제는 울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누가 때렸어요?. 외숙이 “네, 이놈! 밭과 집을 내놓아라! 왜 안내놔”하고, 말로 안되니까 어머니한테 몽침으로 눈을 때리면서 집과 밭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했다. 우리는 설움을 겪으면서, 하루 밤을 지내면서, “복수”라는 두 글자를 생각하고 꿈나라로 흘러 갔다.

 이튿날 할 수 없이 큰방을 외숙에게 비어주고 작은방으로 이사했다. 다음 날 양래 이모가 와서 “형님이 이 집과 밭을 사시오?“ 해서 그럴까 했다. 그때 말가웃지기 논을 팔기로 했다. 그해 농사를 짓고 논을 팔아서 겨우 여덜섬을 마련했다. 방아를 찌어주라고 해서 방아을 찧었는데, 쌀이 두 말이 모자랐다. 그래서 조로 네 말을 되어 주면서 어머니께서는 도둑을 맞았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도 역시 그렇게 말씀하였다. 그럴 때는 이웃간에는 웃고 깔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 어머니 속은 정말 말할 수 없었다     

*에피소드 9- 625전쟁

 단기 4283년(1950.9살) 때는 6월 25일 그날은 매우 따뜻하였다. 그날도 역시 학교를 갔는데, 이상하게도 (괴뢰군이) 서울을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후 선생님이 들어와서 그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해 주셨다. 그래서 그날은 공부를 못 했다. 오전 11시가 되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 국군 아저씨들이 11시 반 차를 타고 싸움터로 가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송별을 하러 가자고 해서 모두 몽탄역에 송별하러 갔다. 마침 그때 국군을 실은 기차는 기적을 올리면서 몽탄역에서 도착하였다. 그때 육군 장교 우리 외삼촌은 누군지 몰라도 눈물을 머금으면서 서로 악수를 하면서 ”성공하여 돌아오자“ 고 하면서 기적을 남기면서 떠나갔다.

 기차를 보내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그때 말 듣기를 방금간 기차가 송정리에서 머리를 돌려서 목포로 온다고 하면서 어른들이 하는 말이 “아 틀렸다”하였다. 그것만은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때 기차에서 내린 국군아저씨들은 본 고향을 찾아 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때 당시 우리 살림은 넉넉지 못했다. 3천만 인구는 한숨 속에 세월을 보냈다.

 미국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1950.9.15.9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돌고, 상륙한 군인 아저씨들은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당시 소식은 3천만 동포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해 겨울이 다가고 봄이 돌아왔다. 봄이와서 식량이 없었기 때문에 나물이 아니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었다. 차차 날이 풀리고 아버지께서는 중노동하셨다.      

*에피소드10- 피난살이와 아버지의 사랑

 넉넉지 못한 살이를 살아나가기 위하여 고구마 장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목포에서 학다리로 피난민들이 많아서 장사가 잘 되었다. 학다리역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비행기가 동북간에서 날아오더니, 거기 장사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놔두고 어디로 숨어 버렸다. 

 그 당시에 몽탄에 지서도 없어지고 보안서라는 공산 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때 지식이 있는 사람은 잡아다 총살시켰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보다 무식해서 그런 것은 걱정이 없었다. 그때 우리는 아침을 일찍 지어 먹고 피난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부모님들께서는 무척 날마다 걱정하시면서 피난을 가게 됐다. 저와 형님, 아버지, 옆집의 대진이 아버지, 동네 사람들과 배뫼, 당촌(몽탄면 이산리)으로 피난을 갔다. 우리들은 잠을 잤는데 어른들은 잠을 안 잤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우리를 보시고 무척 기뻐하셨다. 

 아침을 먹고 오늘은 무안장에서 고구마를 사다먹자 하였다. 아버지께서 장에 가신다고 집을 나섰는데, 조금 있다가 그냥 돌아오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밭에 다 사람을 죽여서 서숙(조)을 뽑아서 덮어 놨다.” 하시면서 기분 나빠서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친구들과 가봤더니 보기에도 흉한 사체가 있었다. 그때는 매일 아침만 자고 일어나면 여기 저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많았다. 그때 동네 사람들은 여럿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인민)경찰이 나와 들어가라 하였다. 낮에는 비행기가 다니고 밤에는 (인민)경찰이 다녀서 어디든지 다닐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맑게 게인 밖을 내다 보니까 비행기 4대가 점잖게 하늘에 떠 있었다. 3대는 낮게 떠있고,한 대는 높이 떠 있었다. 그런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 동서남북으로 갈려 가더니 한 30분후에 요란스럽게 쾅쾅하는 총소리가 나의 어린 가슴을 울려줬다. 잠시후 조용해진 후 밖에 나가서 폭탄 떨어진 자리를 보니까 길이는 20m, 깊이는 2m 가량되게 둔벙이 파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승아씨 말이 죽었다. 이런 날을 보내는 어느 날 비행기는 상공에 떠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삼형제를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쪽 안으로 앉히시면서 이불을 앞에 놓았다. 아버지께서 이것은 총알을 방지하지요 하고 울었다. 총소리가 나면 모두 엎지라고 하셨다. 그 당시 나는 모든 것을 느꼈다. 부모님께서는 자식을 얼마나 사랑해줄까를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글을 정리하며

  아버지는 194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제 인생의 많은 실패와 성취를 경험한 분이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한 시대의 고난과 희망을 상징하는 메시지이다. 내가 아버지의 일기를 정리하며 그 당시의 시대로 돌아가 느낀 감정과 기억을 돼새겨 보려한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어두운 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는 날, 수업을 안하고 전쟁터로 싸우러가는 국군아저씨들을 배웅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가족의 안전을 걱정해야 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어린 마음으로 책임을 지고자 애썼다. 전쟁으로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고, 피난길에 나선 아버지는 여러 번 두려움과 슬픔을 겪게 된다.

“식구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던 아버지의 말은 그가 겪은 고난의 나날을 지탱해 준 기준이 되었다. 아버지는 종종 아프고 힘든 시간을 겪었다. 특히, 객지에서 혼자 아팠을 때 감정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한 순간들 속에서도 아버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생전에 “가족의 사랑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라고 말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의 일기를 통해 가족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고 “가족이 있어야 삶의 의미가 있다”는 아버지의 말은 내 맘속 깊이 녹아있다. 

 아버지의 글로 인해 가족의 사랑과 인내의 가치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새롭게 다짐하는 기회가 된 것 같다. 항상 나에게 힘이 되셨던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워진다. 아버지, 당신은 늘 저에게 힘이 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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