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미터 달리기? 그거 왜 하는데요?
인생 최초의 실패, 일곱 살의 이유 있는 회피
기억에 남아있는 인생 최초의 실패는 일곱 살 때였다.
지금은 아마도 그런 풍경을 보기 힘들겠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가을이면 '가을 운동회'라는 이름으로 온갖 체육경기와 마스게임, 단체게임 같은 것들을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가족과 함께 했었다.
나는 빠른 년생이라(이것 역시 지금은 없어졌다.) 일곱 살에 학교에 입학했다. 흔히 학교에 일찍 입학하면 또래에 비해 좀 약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2월생들은 또래보다 훨씬 큰 애들이 많다. 나도 그 큰 애 중의 하나였고 자연스럽게 '달리기를 잘할 것'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곧잘 했다. 곧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을운동회'는 국민학교(그렇다, 나는 국민학교 출신이다)의 연례행사 중 꽤나 큰 축에 속하는 이벤트였다. 말이 '운동회'지, 그간 갈고닦아온 체육적 기량과 예술적 기량을 운동회를 보러 온 가족, 친지들 앞에서 한껏 뽐내는 일종의 '선생님들의 성과 발표회'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이 '가을운동회' 하루를 위해 몇 달간 운동장에서 마스게임을 연습하고 저학년생들은 '꼭두각시'춤을, 고학년 남자아이들은 고싸움을, 고학년 여자 아이들은 부채춤을 연습하며 무더위를 이겨냈다.
이런 대행사를 예행연습 없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랬기에 가을운동회 전날에는 '총연습'이라는 것을 했다. 내일 있을 가을운동회와 똑같은 순서, 똑같은 컨디션으로 미리 리허설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기억에 남는 인생의 첫 실패를 맛보게 된다.
운동회의 꽃 달리기.
아이들을 여섯 혹은 일곱 명씩 세워놓고 신호총을 쏘면 아이들은 일제히 달려 나가며 누가 누가 더 빠른가 경쟁한다. 그렇게 골인지점에서 1등, 2등, 3등이 정해진다. 나머지 등수는 필요 없다. 오로지 손목에 도장을 찍어주고 선물을 주는 것은 1등과 2등, 3등뿐이었으니까. 아, 꼴등은 좀 많이 부끄럽고 속상하긴 했다.
일곱 살 여자애는 꼴등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1,2,3등 안에 못 들 거면 차라리 별로 티 나지 않는 중간등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신호총이 '탕!'하고 울리는 순간 알았다. 아, 1등이네.
나보다 앞에서 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세상에, 내가 이렇게 빨랐단 말이야? 키만 멀대같이 크고 비쩍 말랐었던 나는 운동신경은 애초에 가지고 태어나질 않았다. 그런 내가 달리기에 재능이 있었다니, 세상에.
조금만 있으면 골인 지점이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자랑해야지, "엄마, 나 1등 했어! 내일도 1등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땅이 솟구쳐 올랐던 탓이다.
"어?"
그리고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땅이 솟구친 게 아니라, 내가 넘어졌다는 것을.
엄청났다. 모래바닥인 운동장을 전속력으로 뛰다가 슬라이딩하듯이 넘어진 탓에 무릎, 팔꿈치 할 것 없이 전부 까지고 쓸려서 피가 철철 흘렀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맞다. 나 달리기 중이었지. 벌떡 일어나서 얼마 남지 않은 골인점을 향해 걷듯이 뛰었다. 꼴등이었다.
놀라 달려온 선생님 품에 안겨서 울었다. 다친 곳이 아프기도 했고, 꼴등이라서 서럽기도 했다.
양호실에 가서 약을 바르고 집에 갔을 때, 깜짝 놀랐던 엄마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엄마는 뛰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다고 나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날, 가을 운동회에서 달리기 출발지점에 선 나는 괜찮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호총이 울리기 전까지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저 총이 울리면 어제처럼 또 달려야 한다. 그러면 또 넘어질지도 몰라.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총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이들보다 늦게 출발했다. 꼴등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게 중요한 것은 달리기보다 '넘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설렁설렁 뛰어서 나는 꼴등으로 골인점에 도착했고 그렇게 손목의 도장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달리기를 할 일은 많았다. 운동회는 매해 열렸으며, 중고등학교 때는 '체력장' 때문에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늘 측정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날을 계기로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로 자랐고 '다칠 수 있는 모든 운동 종목'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일일 100미터 달리기를 '그런 걸 왜 하냐?'는 말로 폄훼하면서.
어떻게 보면 자기 방어 기제가 작용한 것일 테지만, 과연 그렇게 하는 자기 합리화가 내게 어떤 도움이 될까 생각해 보면 씁쓸하기는 하다.
만약, 그때 내가 '넘어져서 다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달리기를 정복했더라면 어쩌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생각해 보면 넘어져서 다쳐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됐어. 아무 일 아니야.'라고 하면 아무 일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날의 그 상처를 스스로 '엄청난 일'로 만듦으로써 '다칠까 봐 몸 사리다가 더 크게 다치는 사람'이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잠깐 내 오른쪽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지난주에 학교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오다가 넘어져서 꽤 크게 다쳤다. 딱지가 앉고도 아직 그 위에 진물이 흐르는 상처를 보면서 왜 어떤 이에게는 별일 아닐 그 일이 내게는 그렇게 크게 다가왔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아직 그날의 그 '사건'과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거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그날의 일을 극복하지 못한 나의 첫 '실패'를 털어놓는다.
어쩌면 이건 최선을 다 하지도 않는 주제에 100미터 달리기 21초라며 시무룩해하던 청소년기의 나와, 늘 조심하면서도 매년 한 번씩은 꼭 크게 넘어지는 중년의 나에게 하는 사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실패'를 제대로 마무리짓지 않아서 지금껏 그 실패는 계속 실패로 남아있다.
그러니 이제라도 일곱 살 가을의 그 첫 실패를 트라우마가 아니라 그저 그냥 있었던 해프닝으로 여길 수 있게 마음에서 털어내려 한다.
넘어지는 건 아직도 아프지만, 언젠가는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겠지.
아파도 울지 않고 피리 부는 개구리 왕눈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