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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루비 Aug 15. 2024

들어주세요, 여보

내 유년의 윗목


주말 오후 집에 들어와 보니 아들 둘이 과자를 먹고 있었다. 새우깡, 땅콩강정, 바나나킥, 콜라도 사서 한껏 맛있게 먹고 있는 녀석들. 처음에는 아름답게 나 한입, 너 한입 하다가 왜 너는 방금 먹었는데 두 번 먹냐고 탓하며 싸우다가 각자 제 걸 챙기며 숨기다가 싸우다가 결국은 아름답게 꿀밤 한 대씩 맞은 뒤에 소란은 종결되었고 콜라는 제일 먼저 동이 났다. 

‘큰 걸사서 나눠먹지, 용돈을 좀 더 줄걸’ 후회도 하면서 옆에 흐른 과자를 하나 입에 넣었다. 

‘엇, 새우깡이 맛이 달라졌구나. 좀 매콤한데?’ 

‘어, 그거 매운맛이야’

‘아, 요즘은 매운맛 새우깡도 나오는구나’ 내가 과자를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생각해 봤다.


나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다. 지금도 전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시골인 곳.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랐던 곳.

시골 할머니댁 앞에는 동산도 있고 집 뒤에 텃밭도 있었고, 조금 걸으면 냇가도 있었고 바로 집 옆에는 나랑 동갑인 윤섭이도 있었다. 겨울에는 썰매도 타고 놀았고 여름에는 발가벗고 목욕도 하고 그랬다. 그래서인지 나는 할머니집에 맡겨지기 전까지는 시골에 가는 걸 꽤 좋아했었다. 

넉넉하지 않았던 형편에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던 아버지에게 4살과 7살이었던 나와 동생은 조금 짐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부모님은 2년을 약속했고 나와 동생은 시골집에 맡겨져서 2년 동안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날카롭던 사춘기 시절에도 부모님에게 그리 원망이 없었던 이유는 당시 어리고 절박했던 부모님에 대한 동정과 어린 손주를 보듬고 살폈던 할머니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맡겨졌던 첫날이 기억난다.


‘할매집에서 한 밤 자고 내일 갈 거야’ 

나는 엄마의 말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고 내일 출발하기 전에 꼭 챙겨가야 될 장난감이며 나무 권총 같은 것들을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하지만 다음날 나는 분명 늦잠을 자지 않았는데 눈을 떴을 때에는 엄마, 아빠는 없었다. 

“할매요, 엄마는?”

“밭에 일하러 갔다. 저녁에는 올끼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아마도 해질 무렵까지는 계속 기다렸던 것 같다. 아빠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기를.  

 아직도 그날의 아침 기억이 생생한 이유는 7살 사내아이에게는 하루아침에 부모가 사라진 상황이 공포이자 두려움이며 슬픔이자 배신감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울다가 지쳐서 기진해 있는 내가 안쓰러우셨나 보다. 

“울지 마라, 엄마랑 아빠는 열 밤만 자고 나면 온다. 그때까지 할매랑 같이 있자. 응?”

약속했던 열 밤이 지난 이후로는 잘 자지 못했고 쉽게 먹지 못했다. 가만히 있다가도 툭하면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밥을 먹다가, 벌겋게 불씨가 남아있는 아궁이를 들여다보다가, 할머니와 장에 내다 팔 나물을 톡톡 다듬다가도 불쑥 눈물이 났다. 엄마 생각이 나서. 

내가 울기 시작하면 동생도 따라 울었는데 나와는 달리 동생은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달래고 달래다 결국에는 “계속 울면 다리 밑에 거지가 와가 잡아간데이” 겁을 주고 나서야 울음을 그치곤 했다. 갑자기 다른 집에 내맡겨진 네 살배기에겐 그 어떤 말보다도 무서운 말이었겠지.

동생이 따라 울까 봐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날 때나 엄마 생각이 날 때면 항상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렸다. 그러고는 조용히 실컷 울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나를 무릎에 눕히고는 배를 쓸어주셨다. 조용하고 환하고 따뜻했던 할머니의 목소리, 손길. 


그러다 보면 골목 끝에서 느리게 걸어오는 엄마나 아빠가 더욱 기다려졌다. 다른 마음 없이 오직 보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 찬 순간, 홀가분하고 가볍게, 넓고 환하게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멀리서부터 다가올 엄마와 아빠를 단번에 떠올렸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나와 동생에게 내밀어 주신 과자 한 봉지를 아직도 기억한다. 기껏 새우깡 한 봉지를 나와 동생은 숨 쉬는 듯 천천히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나누어 먹었다. 부드럽고 고소하고 은은한 짠맛, 한 입 물면 기분이 나른해지는 익숙한 맛. 과자는 왜 이렇게 맛있을까.

‘아주 조금만. 참아볼게요’

4살 7살 아이들에게는 할머니의 따스한 말보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이 훨씬 위로가 되었나 보다. 

그때 내 꿈은 방 한가득 과자를 쌓아두고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배가 부를 때까지 과자를 먹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조금 자랐고 나와 아내는 다소 나이가 들었다. 눈밭에서 뒹굴고 눈을 뭉치고 굴리는 것보다 눈 내리는 정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고 물속에 몸을 맡기는 것보다 저 만치서 바닷소리를 듣는 것이 좋아졌다. 그리고 다소 수다스러워졌다. 

언젠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시골에서 자라면서 겪은 일들을 얘기한 적이 있다. 

‘여보, 나는 어릴 적에 토끼도 잡아봤어’

‘여보, 나는 시골에서 어른들이 개 잡는 것도 봤어’

‘얘들아, 아빠는 시골에서 꿩 잡고 뱀도 잡으면서 놀았어. 소도 몰아봤어’

아내는 알겠다고 했지만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아이들은 잠시 호기심을 보이더니 이내 딴청이었다. 반응이 없으니 재미도 없다. 나 역시 이내 시들해지고 만다. 

그렇지만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시시콜콜 다 얘기하고 싶다. 나만 아는 상실과 추위, 나는 모르는 아내의 상실, 아내의 추위도 있겠지. 시시콜콜한 것들을 다 듣고 싶다. 다 나누고 싶다. 


과자 한 봉지를 가지고 투닥거리는 아들들을 보며 다 큰 어른이지만 먼 기억 속 이야기에도 속상할 때가 있고 괜히 울적할 수도 있다고, 다 그럴 수가 있는 거라고 나의 아들들에게도 쉬지 않고 들려주고 싶다.  

굳건하고 의연한 어른을 흉내 내지 않더라도 사소한 기쁨의 기억으로도 살아내는 것이 내가 체득한 삶의 방식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어떤 시인은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렸던 기억을 ‘유년의 윗목’이라고 했던가?

내게도 그런 게 있으니 들어달라고. 시시콜콜 나의 은은하고 짭짤했던 유년의 기억을 당신에게는 들려주고 싶다고.


정작 아내에겐 이런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아내는 내 얘기를 들으면 어떤 말을 할까? 소리 없이 웃고 있을까? 자기 얘기를 털어놓지는 않을까? 

언젠가 우리가 ‘우리’여서 그것만큼은 참 다행이었다고 수다스럽게 말하며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니까 우리는 좀 더 어수선하고 소란하며 유난스럽고 울퉁불퉁한 것이 맞다고, 지금보다 더 소란해져도 좋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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