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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재 이진주 May 13. 2024

울 엄마가 가고 싶다는 집에는 언제 갈 수 있을까?

잃어버린 기억, 남아있는 기억

신록의 계절,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어가던 사월의 끝자락에서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다. 철쭉꽃이 한 소쿠리씩 피어있는 오후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진다. 비 갠 뒤라 공기가 맑고 신선하니 봄 햇볕은 제법 따사롭다.

무슨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다.

요양원에서 창밖의 세상을 볼 수도 없으실 안타까운 우리 엄마를 생각했다.

이렇게 푸르른 날에는 노랑 민들레가 홀씨를 날려 보내려고 꽃대를 높이 올려놓고 명지바람을 기다린다.

세상은 알록달록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를 가져오건만 우리 엄마는 몇 년 전부터 계절을 잃어버렸다. 더불어 기억도 잊혀 가고 있다. 아, 안타까운 우리 엄마.     

나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요양원으로 달린다.

차창밖으로는 새파란 보리내음이 차 안으로 들어오고 가로수들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변신하고 있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유명가수의 노래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노래다. 나는 가끔씩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엄마한테 간다.

이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해 보는 일일 것이다.

“바람 불면 감기들 세라. 안 먹어서 약해질 세라. 힘든 세상 뒤쳐질 세라. 사랑 때문에 아파할 세라.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울 엄마가 보고파진다.”

군산 요양원에 가는 동안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르게 된다.     

울 엄마는 3년 전에 요양원에 가셨다.

간간히 섬망이 생기고 기억력도 약해지면서 홀로 생활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혈압약과 위장약도 한 달 치를 처방해 오면 며칠 만에 다 드시고 없다고 하신다. 나는 엄마의 행동이나 언어나 건강상태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눈은 백내장이 점점 진행되어 환하게 볼 수 없으니 주변 정리가 안되었다.

허리가 아프다고 파스를 여기저기 붙이시고 소화가 잘 안 된다며 가스**를 과다 복용하기도 하셨다.

어느 날에는 전화도 못 받으시고 겨우 통화가 되면 “나 아파서 죽겠다. 어디로 좀 데려다 주거라.”하신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들러 진료를 받고 치료도 해 보았지만 좀처럼 나아지지가 않았다. 담당 의사 선생님의 소견으로는 고령으로 인한 신체 기능저하와 심리적인 불안과 약간의 치매증상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겪게 되는 나는 갑작스럽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다음날에는 엄마가 통증을 호소하며 이상한 행동을 보이셨다.

“나 좀 안 아프게 해주는 곳에 데려다 주거라. 요양병원에라도 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잠시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가기 싫다고 나더러 “절대 그런 곳에 보내지 마라”라고 부탁하시던 어머니였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왜, 그곳에 보내 달라고 하시는 걸까?

고심 끝에 형제들과 상의하고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요양병원에 잠시 모시기로 했다.

그곳에 계시는 동안 통증은 개었으나 정신이 혼미하여 눈도 초점을 잃으셨다.

상태가 심각함을 인식하고 다른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지인분의 소개를 받아 지금 계시는 요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 요양원에 오신 지 3년쯤 되어가는데 신체적으로 조금은 회복되시고 인지활동도 큰 무리 없이 하시고 계신다. 다만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계신다.     

요양보호사님께서 가끔씩 영상통화를 걸어오신다.

가끔씩 울 엄마가 아들이 보고 싶다고 하신단다. 그럴 때면 영락없이 영상통화를 걸어주시는 팀장님께 정말 감사를 드린다.

“엄마, 나야, 아들. 보고 싶었어요?”

“응, 보고 싶었어. 언제 올래?” “시간 되면 왔다 가거라.” 하신다.

“엄마 어디 아프신 데는 없어요? 불편한 것은 없고요?”

“응 다 괜찮아, 선생님들이 다 잘 대해 주니까 잘 지내고 있다.”

“다만 눈이 흐릿해서 뿌였게 안개 낀 것 같아. 그것 말고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씀하신다.

“나 여기서 너무 오래 있으니 지루하고 해서 이제 집에 가고 싶어. 나 좀 집에다 데려다주라.”하신다. “집에 가서 혼자 지내시며 경로당에도 가고 할머니 산소에도 돌아보고 싶다.”라고 하신다.

나는 엄마가 가고 싶은 집이 어떤 집인지 알고 있다.     

어머니의 남아있는 기억에는 처녀 때 살았던 집에 대한 기억들 뿐이다.

앞집에 누구, 옆집에 누구, 샘모퉁이 돌아 누구네라고 기억하신다.

엄마가 처음에 집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요양원에 오시기 전에 사시던 집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시던 집으로 갔다.

“여기가 어디여?”하신다. 나는 “아이쿠야!” 깜짝 놀랐다.

엄마가 쓰시던 물건들이며 살림살이가 그대로 있었지만 엄마는 자기 집의 기억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우리 가족들의 사진도 걸려있었지만....

“엄마, 여기가 엄마가 그동안 사시던 집이야, 엄마집 말이야.”

“몰라”...  

“여기서 누가 살아?” 물으신다.

우리 엄마는 언젠가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자기 집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셨다.

이 집에서 아버지와 10년을 사셨고 이사오기 전에는 하제 집에서 30년을 넘게 살으셨다. 그렇다면 40년 세월을 몽땅 잃어버린 것이다.

하늘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엄마가 치매가 심해진 탓일까? 이러다 치매가 심해지면 어떡하지.

하지만 엄마는 일상적인 대화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느꼈다.

단순한 대답과 질문에는 소통을 할 수 있어서 내심 마음이 놓이긴 하였다.

그리고는 엄마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나는 어떤 집에 가시고자 하는지 알게 되었다.

오늘도 나를 보고 “잘 있었어?. 어디서 왔어?.” “네, 전주에서 왔어요?”

“차 타고 왔어? 뭐 하러 와. 나는 잘 있어.”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말씀하신다.

“나, 여기 오래 있으니 지루해. 나 좀 집에다 데려다주라.”하신다.

“어디 집에 가고 싶으세요?” “하의도 대리 집에.”하신다.

“엄마, 지금 밖에는 바람도 불고 배가 못 가요. 조금 있다가 날씨 좋으면 나랑 가시게요.”

“그래 그럼 날 좋을 때 가자.” “따뜻해지면 가자.”하시며 금세 체념하신 듯

“나 올라가련다. 어서 가거라.” “가자”하시며 요양보호사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오르신다.

문이 닫히기 전에 나를 돌아보고는 슬픈 모습으로 울컥하신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머릿속은 우리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운다.

엄마가 잃어버린 기억은 어디까지이며 엄마에게 남아있는 기억은 어디까지일까? 이러다가 자식들에 대한 기억조차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기도한다. 울 엄마의 모든 것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할 수 있거든 좋은 기억만이라도 남겨 두시라고...

엄마는 아직도 희망은 있다. 가끔씩 손주들의 안부나 증손자들의 안부도 묻는다. “애들은 잘 크냐?” “별 탈은 없지?” “집안은 다 편해?”

내가 핸드폰에서 사진을 확대해서 내 손주들을 보여주면

“그놈, 참 듬직하게 생겼구나. 딸들은 예쁘기도 하지.” “누구 딸이냐?”

사실 울 엄마는 사물을 훤하게 보실 수가 없다.

백내장이 심해진 탓으로 흐릿하게 보시고 짐작만 하실 뿐이다.

그런 엄마가 나는 너무 안타깝고 눈물이 글썽이게 후회스럽기도 하다.

진즉에 백내장 수술을 억지로라도 했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을 맞게 되니 죄인 된 불효를 어찌할 것인가?

지금 시점에서는 어머니의 건강과 고령으로 수술을 한다 해도 개선된다는 보장도 적다고 한다. 오히려 진척 없이 고생만 하신다는 의사의 소견도 있어서 결국 어머니의 의사를 존중하게 되었다.

얼마나 고집이 세신지 그렇게 권유하고 설득에도 설레설레 하시며 나이 들면 다 그렇게 사는 것이지 하신다. “느그 아부지 눈 수술하고 겁나게 고생한 걸 보았다.” “나는 싫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어머니.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

나는 이분의 아들로서 평생 지울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가고 싶은 집이 어떤 집인 줄 안다.

그렇지만 지금은 갈 수도, 그토록 가고 싶은 그 집도 없다.

우리 엄마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셨다고 했다.

엄마가 9살때 식민지에서 해방되던 해 할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여 안군 하의도 대리에서 정착하여 살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살다가 아버지와 결혼하시어 진절이라는 작은 섬에서 우리 5형제들을 낳고 살으셨다.

이곳에서 딸 하나를 잃고 생활고로 군산에 이사오셨다. 군산에서 또 딸 하나를 잃으셨다.

그런 엄마이기에 그 가슴속에는 얼마나 깊이 패인 응어리가 있겠는가 짐작도 못한다.

아주 오래전 우리 외갓집은 외삼촌 도시로 이사 나오심에 의해 팔리고 지금은 집터조차도 없어진 곳이 되어버렸다.

장병도에 있던 집도 아버지께서 군산으로 이주하시면서 파셨기에 지금은 그곳도 수풀로 덮여 알 수가 없다.

군산에 오셔서 바닷가에 손수 지으셨던 집도 군부대에서 이주명령으로 다 철거되어 없다. 시내에서 사시던 아파트는 기억에서 지워졌다.

모든 것이 무의미 해진 우리 엄마는 날마다 나만 오기를 기다리신다고 한다.

내가 오면 집에 가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오면 집에 데려갈 줄 알았는데 왜, 안 데려다주냐?”

“나 우리 집에 가고 싶어.” 어떤 날은 “너 온다고 해서 짐도 다 싸 놓았는데”하신다.

다시는 갈 수 없는 집, 우리 엄마와 언제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엄마는 갈 집이 없다.

엄마는 마음속에 친정집이 자기 집이고 그 집에 가고 싶으신 것이다.

점점 작아지시는 우리 엄마는 올해 91세이시다.

영영 다시 갈 수 없는 집을 그리워하며 나이마저 잃어버리신 안타까운 우리 엄마는 기쁨도 슬픔도 잊어버리셨나 보다.

"청춘을 돌려다오, 청춘아, 내청춘아 어딜가았느냐.."를 입에 붙이신 우리엄마

오늘도 요양원에서 해가 뜨고 지는 줄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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