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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와 Mar 13. 2024

동아일보 매거진 인턴 기자(여성동아) 서류에서 면접까지

보이지 않는 목적지에 믿음을 가지기

*해당 채용 전형과 관련한 질문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죄송합니다.


금요일에는 여성동아 면접을 보고 왔다. 월요일이면 발표가 나지 않을까? 하던 기대는 무색하게도 월요일은 아무 소식이 없이 지나가 버렸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중간항의 방황에서 이 글을 쓰게 됐다.



 지난 3년간 은평구 대조동에서 살았다. 계약 종료 연락을 늦게 한 탓에 자동 1년 연장이 되어있었고 언제든지 방을 빼준다는 생각으로 부동산의 손님들을 맞이했다.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방을 빼고 싶었다. 어디선가 듣기로 사람이 바뀌려면 사는 곳, 일어나는 시간, 만나는 사람 중 하나라도 바꾸어야 한댔다. 일어나는 시간도 만나는 사람도 바뀌었지만 사는 곳은 내 의지로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계약을 해야 내가 나갈 수 있는 상호적인 것이었다.


대조동에서 가꾸던 식물들


나는 괴로운 1년을 보냈다. 할머니가 나쁜 방법으로 죽고 난 뒤에 울지 않은 주가 없었다. 그냥 걷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죄책감에 자꾸만 시달렸고, 아파하는 할머니가 꿈에 나오기도 했다. 할머니가 불쌍하다는 동정심은 시간이 지나서 잊히거나 사라지기보단 엄마에게 옮겨갔다. 엄마가 불쌍했다. 그렇다면 내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 엄마에게는 슬픔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빨리 이사를 하고 사는 곳을 바꾸어서 내 삶을 다시 설정하고 싶었다. 방 계약은 아주 뜬금없이 이뤄졌다. 나와 동문이라는 어떤 임용 준비생 여자애가 들어오기로 했다. 나는 계약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 사람에게 여기서 살면서 좋은 마무리를 했다고, 취업에도 성공하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나가게 되는 거라고,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럴 수는 없었다. 대조동 집의 마지막을 상처로 채웠다. 그저 왠지 모를 죄책감에 사비를 들여서 퇴실 청소를 해주었다. 그래도 그곳에서의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면 집을 빼기 며칠 전 여성동아에서 서류 합격을 주었다는 점이었다. 다만 필기시험이 이사 이후라 어디서 필기시험을 준비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방을 빼고 바로 다음날이 필기시험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동아일보로 갈 수 있도록 종로 3가에 있는 모텔을 잡은 뒤 교보문고에서 하루종일 머물렀다. 방송사 입사 시험이라는 언론고시가 당최 무엇인지 관련 책을 읽어봤고 여성동아를 포함해 여러 여성지를 읽었다. 주말이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닥에 앉을자리마저 부족했다. 누군가 의자에서 일어나면 앉아보려고 구석의 어느 책장 아래에 자리를 잡고 여성지와 히토 슈타이얼의 책을 보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 책장이 방송/미디어 전문 서적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와 관련한 서적들이 잔뜩 있었고 나는 그저 거기에 있는 것들 중 나쁘지 않아 보이는 제목의 책들만을 골라 하나씩 읽어 나갔다.


시간이 참 빨리 갔다. 사람이 많았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집중했다. 밤이 되어서는 내용을 잘 정리하려고 PC방으로 갔다. 소시지 덮밥을 시킨 뒤에 필기시험을 워드로 연습했다. 몇 가지 키워드를 잔뜩 뽑고 논리적인 글쓰기법을 책과 여타 블로그들을 보며 공부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나마 공부한 A4용지 5장 정도 분량을 프린트해 모텔로 향했다. 비가 많이 왔다. 사람들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풍경을 겨우 비집어 끼고 들어가야만 했다. 비가 오는 풍경은 나를 포함한 종로 3가 노포의 모든 사람들이 고독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모텔에서 들리는 옆 방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프린트해 온 종이들을 열심히 봤다. 혹시 잠을 못 자면 어쩌나 했지만 금방 잠들었고 일어나자마자 필기시험장으로 갔다.


여성지 필기 시험장에는 20명이 왔다. 특이한 건 나 혼자 남자였다. 그리고 왠지 이런 분위기에 다들 능숙해 보였다. 논술 주제는 AI 법적 관리, 작문 주제는 '숏폼'이었다. 논술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썼고 작문은 미대 학부 시절 누드크로키를 숏폼과 비교해 써냈다. 필기시험이 끝나고 나니 헛헛한 마음에 교보문고로 가서 의미 없이 뱅뱅 책 사이사이를 돌았다. 작문 시험의 아쉬움을 생각하며 노래를 듣다가 이사할 집을 구하기 위해 서울대 입구로 갔고 부동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으나 조건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무직인 나에게 대출이 나오는 곳은 없기에 어느 부동산도 반겨하지 않았다. 전세 대출을 받고 싶다고 하면 직업부터 물어봤고 "지금 실직상태거든요."라고 몇 번이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자취를 위해 부동산을 둘러본 경험이 있으니 하루면 구해지지 않을까 하는 어리숙한 계획은 허무하게 무산됐고 그렇게 며칠을 서울대 입구의 모텔에서 살았다. 신림이 제일 싸다는 이야기는 서울을 방랑하는 20대들의 허풍 섞인 푸념 같은 거였을까? 신림은 꼬여 있는 잔뿌리 같은 도시, 모두가 그곳에서 아둥대느라 들어갈 자리가 없는 듯했다. 결국 더 싸다는 금천구로 갔고 금천구로 간 당일 월세로 방을 구할 수 있었다.


계약을 하자마자 입주했다. 텅 빈 방 안에서 멀리 사는 가족을 떠올리며 이불이 없으니 또 당분간 모텔에서 지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날은 매우 울적하고 힘들었다. 아빠에게 이사와 관련해 조그만 금전적 도움을 받았고 가구를 사라는 용돈도 받았다. 기쁘지가 않았다. 처참하고 미안했다. 돌이켜보니 나의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지지리도 게으르거나 재능이 없는 나를 선한 엄마와 아빠가 겨우 이 정도라도 올려놓은 건 아닐까, 이런 가족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주는 오만한 괴로움을 이겨낼 방법은 세상에 그리 흔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불이 왔다는 소식에 다음날부터 바로 새 집에서 잠을 잤고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벽지와 바닥을 모두 손수 갈아엎어버렸다. 그렇게 하루종일 고생하고 나니 왠지 이 집에도 정이 묻는 느낌을 받았다. 책상을 사 컴퓨터도 올렸고 침대도 주문했다. 짐들을 하나씩 풀어 나갔다.


필기에 합격했다. 너무 기뻤다. 그 어떤 결과보다 행복했다. 그런 기쁨을 맛보면서, 나는 정말로 글을 쓰는 일을 원하는구나 하고 마음을 정리했다. 편집 보조나 소셜 미디어 운영 업무에 지원했을 때 서류 탈락의 씁쓸함을 모두 덮을 정도의 기쁨이었다. 면접 준비를 위해 여성동아를 처음부터 끝까지 파헤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소개나 지원동기는 제쳐두고 동아일보의 역사부터 여성동아의 가능한 모든 걸 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적어둔 분량만 A4로 10장이 나왔다. 면접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고민하며 유니클로에 가봤지만 세미 정장이 너무 비싸서 그냥 집에 있는 카디건을 입기로 하고 쿠팡에서 몇 천 원짜리 갈색 넥타이를 샀다.


은유, <쓰기의 말들>

면접날 한두 시간 일찍 도착해서 교보문고를 갔다. 박완서의 1970년 등단 이후 1971년 여성동아 첫 발표작 <세모>를 읽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고 면접 건물로 들어가 대기를 시작했다. 내가 준비한 서류는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뿐이었다. 심지어 2점대 성적이라 있으나마나한 종이 쪼가리였다. 면접 대기자 관리 직원은 "이 두장이 끝이에요?"라고 의아하게 물었다. "네 끝입니다.." 하고 생각해 보니 나는 토익 성적도 없고 증명할 경력도 없지. 다른 면접자들은 당연하듯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항상 정량이 부족한 사람이긴 했지. 하고 느낄 수 있었다. 한 시간가량 면접 대기를 했다. 뽑아간 면접 예상 질문지는 이상하게도 읽고 싶지가 않아서 집에서 가져온 은유의 <쓰기의 말들>을 읽었다. 내가 면접에서 보여주고 싶은 건 어떤 기본기 단단한 충실한 대답을 하는가 보다는 내가 왜 쓰고 만들어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은지를 잘 말하고 싶었고, 그 감정이 가닿을 수 있도록 빌릴 표현이 이 책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방이 축축했다. 안에 있는 물병 뚜껑이 덜 닫혔던 건지 가방 아랫도리에서 물이 뚝뚝 흘러나왔고 바지 허벅지 부분이 흠뻑 젖고 말았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기억이 난다.


면접장에서는 권위 있어 보이는 3명의 면접관이 있었고 그 중 이름을 아는 사람도 있었다. 나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어떤 대답은 괜찮았던 것 같고 어떤 대답은 엉뚱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말았다. 다만 마지막 할 말로 전형이 시작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난 것 같은데, 그 한 달의 시간 동안 너무 행복했다. 평소 관심 가져온 잡지사를 더 자세히 공부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린다고, 감사합니다. 하고 소심한 목소리로 안녕히 계세요. 하고 나왔다. 그다지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면접을 보고 나온 느낌에 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결과를 기다려야만 하겠지. 붙는다고 해도 인턴 경쟁일 텐데, 아직 9부 능선에 오지도 않은 건데 그저 시간을 기다려야겠지. 하늘이 무언가를 결정해 주겠지. 하고 생각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후련함과 초조함이 동반했다. 왠지 떨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음습했고 그 느낌에 내가 자꾸 눌려만 갔다. 조바심이 나고 면접을 복기하며 자책하게 되기도 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초조한 사람이 되어 버렸을까. 그런데 그 시간도 지나서 이제는 될지 안 될지도 모르지만 안 되면 슬프겠지, 되면 기쁘겠지라는 생각으로 생략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도 이 한 달의 경험은, 면접장에서 마지막 말로 한 것처럼 이 시간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명확하게 다져볼 수 있었고 좋지 못한 결과를 받고 난 다음 내가 취해야 할 태도가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분명 어디선가 더 나은 일을 더 좋은 환경에서 더 큰 사건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필기 시험장에서 보았던 사람들, 면접장에서 보았던 사람들, 면접장을 오고 가며 마주친 직원들을 언젠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꼭 그때 내가 면접을 봤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즐겁게 인사하는 미래를 스케치할 수 있게 되었다.


건강한 다음을 생각할 힘을 언제든지 유지하는 건 중요하다고 믿는다. 안 되면 일본에서 3개월 만에 온 애인과 한 달 동안 행복한 시간 보내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보다 체계적이고 똑똑하게 준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된 뒤에 더 큰 꿈을 위해 길게 보면 된다.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 곧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인생을 느슨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내 마음먹기 나름이겠지. 언제가 되었든 의미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세상에 기여하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내 것을 찾는 사람들이 생기게 하자. 그게 어떤 방식이든, 내가 언젠간 그곳에 적응하고 안정을 찾는다면 다시 나의 옛날 친구들에게 돌아가 당당히 인사하고 싶다. 나는 꼭 그렇게 되고 싶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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