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때 글을 써본 후로 직장에서 글쓰는 시간을 가져본 건 전무하다고 느껴진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읽은 책이라고는 육아서와 교육에 관한 책이 전부일 정도로 책과도 거리를 두고 살아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2년 동안 글쓰기 동아리 활동을 하며 글을 쓰다 보니 노트북 앞에 앉아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나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 글은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나만의 무언가가 실체적인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글로 변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이루어져야 하고, 조금 더 나은 글을 풀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하게 되고,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과연 맞는지,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서 곱씹어 보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찰과 사색이 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핫이슈가 되고 있는 ‘한강’ 작가의 책을 다들 읽어봤을 것이다.
내가 글을 쓰면서 변화된 부분이 바로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치 10년 넘는 세월 동안 멀리했던 오랜 친구와 다시 만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예전에 소설책을 보면 글의 줄거리에 몰입해서 읽었는데, 내가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 유명한 작가는 어떤 식의 비유적 표현과 묘사의 방법을 구현하는지에 대해 집중해서 보게 되고 절로 감탄하게 되는 부분이 생겼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한다. 퇴근 후 집에 오면 집안일을 마치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핸드폰 영상에 빠져 휴식을 취하던 엄마의 모습에 익숙했던 아이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본인들도 TV를 끄고 옆에 와서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이라고 얘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나는 누구인가? 가 궁금해서, 내 안에 뭔가를 끄집어 내서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까? 아니면, 타인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 나라는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쓰는 걸까?
우리는 글을 쓰면서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명료하게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탐구하고,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행위인 것이다. 나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든, 글쓰기야 말로 인간이 가진 마지막 자유이며,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며, 살아 있다면 써야 하는 것도 글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꼭 기억해야 할 일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힌다. 그 당시에 느꼈던 생생한 느낌과 감정을 세월이 흐른 후에 표현해 보라고 하면 어려운 일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기록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유산으로 남는다. 나만의 역사책이 되는 것이다.
우리 동아리 회원 중에 손으로 쓴 아버지의 일기를 직접 타이핑하신 분이 계신다. 작은 쪽지 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글을, 노안이 찾아온 쉰이 넘은 나이에 하나하나 옮겨적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흐릿해지는 시야를 좁혀가며, 잃어버린 작은 글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정신을 가다듬고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젊은 시절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같이 따라 걸으며, 자식을 키우며 느꼈던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어른이 되어서 보니 비로소 아버지의 삶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고, 그리웠던 아버지의 흔적을 되새기며 위로받는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내마음에도 잔잔한 감동이 번져왔다.
우리의 글의 시작은 바로 가장 가까운 곳, 가족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막상 무엇을 써보라 하면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막막하고 고민이 되기 마련이지만, 글감은 결국 우리 곁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자신과 맞닿은, 가장 진솔한 이야기들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같은 지역에서 함께 근무하며 가까워진 동료 회원들, 그리고 작년에 동아리 활동을 통해 인연을 쌓은 회원들—저마다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그들이 쓴 글을 읽으며 각자 한 가지씩의 아픔을 품고 있는 분들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깊은 고통 속에 머물렀던 분, 어린 나이의 형제를 떠나보내야 했던 분, 평생 아픈 몸으로 살아온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 가난 속에서 지나온 유년 시절, 아버지가 교도소에 가기 전 떠났던 마지막 가족여행의 기억, 장애를 가진 자녀와 함께하는 삶의 이야기까지—평소에는 쉽게 꺼낼 수 없었던 기억들이 글을 통해 서로의 마음에 닿게 된 것 같다.
글쓰기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진솔하게 끌어내지 않으면 독자의 마음을 울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담긴 아픔과 희망에 공감하며 감동을 나누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것 같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날마다 무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쓰는 단순한 문자나 SNS 활동도 글쓰기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짧고 건조한 문자를 좀 더 따뜻하고 풍성하게 담아보낼 때, 그 자체로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직장에서도 업무적인 내용을 메신저로 전달하기에 앞서 요즘 날씨나 건강, 또는 마음에 남는 문구 한 줄 덧붙여 보면 어떨까? 그렇게 한 줄 더해진 마음으로 그 사람이 조금은 달라보이지 않을까?
우리 동아리 회원 중에 ‘다섯 줄의 법칙’을 지키는 분이 있다. 모든 글의 시작은 비슷하다. 도입 다섯 줄만 이해한다면, 어떤 글도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매일 바쁜 일상에 쫓겨 살면서도 하루에 다섯 줄씩 쓰면서 하나의 글을 완성해 가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다.
1993년, 흑인 여성으로서 첫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은 편집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책을 만들면서 정작 자신이 진정으로 읽고 싶었던 책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신이 정말 읽고 싶은 글이 있는데 아직 쓰인 게 없다면, 당신이 직접 써야 한다”고 말했다.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 스스로를 탐구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려는 강렬한 열망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글쓰기는 단순한 창작을 넘어,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고 세상과 깊이 연결되려는 인간적인 본능과 욕구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생에서 예기치 않은 시련을 만났을 때, 좌절하지 않고 끝내 시련을 극복해내는 인간의 모습은 훌륭한 글의 영원한 테마이다. 자신에게 닥치는 크고 작은 시련을 그런 테마로 멋지게 승화시켜 멋진 글을 써보도록 얘기하고 싶다.
토니 모리슨처럼 자신의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는 생각이 아직 세상에 글로 남겨져 있지 않다면, 한번 써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자신의 진짜 이야기는 표현하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