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친절한 곰님 Oct 06. 2024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알베르 까뮈,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온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장례는 내일 치를 예정임. 삼가조의를 표함.' 이것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어제였나 보다.<이방인>(온스토리,9쪽 2013)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까뮈가 1942년에 발표한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은, 소설을 읽지 않았어도 첫 문장은 들어봤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의 첫 문장은 강렬하다. 그리고 기억하기도 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강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내용도 독특하다. 평범한 직장인 뫼르소는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듣고도 슬퍼하지 않고 한 여자를 만나 영화를 보고 정사를 나눈다. 그 이후 알제리의 휴양지에서 만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는데 법정에서의 주요 화제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사건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슬퍼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결정적으로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을 때 '햇빛이 눈이 부셔서 그랬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배심원들도 그를 냉혈한이나 사이코패스로 생각하게 된다. 결국 뫼르소는 무난하게 풀려날 것이라는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무자비한 인간으로 부풀려지며 사형선고를 받는다. 상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뫼르소는 거듭되는 신부의 면회를 거절하며 어머니의 삶에 대해,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는 날 보다 많은 군중의 함성을 들으며 자신이 덜 외롭다고 느끼기를 바란다.


'캐릭터 박물관'이라는 것이 세워진다면 뫼르소는 특실에 전시되어야 한다. 같은 방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 멜빌의 '바틀비', 그리고 까뮈보다 3년 먼저 태어난 이상이 탄생시킨, 뫼르소보다 6년 앞선 '날개'의 주인공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하나의 캐릭터가 소설의 거의 전부다. '이방인' 역시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루어진, 그를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관건인 그런 작품이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139쪽,한겨레출판)


나는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내가 그의 연인이었다면 그가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뫼르소와 어머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어서 일수도 있고, 아무 일도 없어서  그런 감정이 생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슬퍼하지 않는 것도 감정이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이해한다.


정말 오랜만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약혼자'를 받아들였는지, 왜 다시 시작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주위에서도 저녁은 애수 어린 휴식과도 같았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서서 엄마는 자유를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누구도, 누구라도 엄마를 위해 울 권리는 없다.<이방인>(온스토리 146쪽, 2013)


그러면 그가 아랍인을 살해한 것은 이해할 수 있을까? 뜨거운 햇빛 때문에 아랍인을 총으로 쏜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변호사는 뫼르소의 감형을 위해 최대한 말이 되게끔 말을 맞출 것을 제안하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뫼르소는 거절한다. 그는 왜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단순하게 그의 고집인 것인가. 이 책이 82년이 넘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는 뫼르소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묻는 일은 의문만을 남긴 채 도돌이표로 나에게 돌아온다. 수없이 다시 묻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을 말하자면 뫼르소는 엄마를 이해함과 동시에 본인 스스로를 이해하며 행복해하는 것으로 책이 끝난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모든 것을 다시 살 준비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걷잡을 수 없었던 분노가 나를 정화시켰고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신호들과 별들로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내 마음을 열었다. 나와 너무나 닮았으며, 진정한 형제처럼 느껴지는 세상과 더불어, 나는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일을 완수하기 위해.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덜 외롭다고 느끼기 위해,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사형이 집행되는 날, 보다 많은 군중들이 증오의 함성을 지르며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온스토리 146쪽, 2013)


작가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이렇게 고민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작품은 늘 작가보다 더 많이 말하는 법이라는 문장이 생각나는 날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알제리 현지인과 대비되는 이주민(외지인)이라는 의미와 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라는 의미가 함께 담긴 중의적 표현이다.(*뫼르소는 알제리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정착민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이름인 '뫼르소(Meursault)는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을 의미하는 단어의 앞부분을 따 조합했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이유를 햇빛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은 그의 이름에 이미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무위키 참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