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친절한 곰님 Oct 28. 2024

건너갑시다

(이 순간, 같이)

나는 신호가 꺼진 신호등이 있으면 좀 돌아가더라고 켜진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이용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시간에 쫓겨서, 빨리 가고 싶어서 꺼진 신호등을 건널 때는 멀리서 달려오는 차를 파악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속도를 조절한다. 달려오는 차가 꽤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여유 있게 걷다 보면 어느새 차는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는데, 이상하게 속도를 줄이는 낌새가 없으면, 난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쫓기듯 걸음 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싫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싫어서 언제부터인가 불 꺼진 신호등으로는 잘 가지 않는다.

  

짧은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 한 달에 한번 정도 직장 근처 미용실에 간다. 미용실 맞은편에 작은 마트가 하나 있어서 소소한 먹거리도 같이 사는 게 루틴이 되었다. 불편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 마트를 가려면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차량이 많지 않은 편도 1차선 도로이지만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신호등이 생겼다. 그 주변에 사는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고 신고로 설치된 것 같았다. 


다니던 미용실이 리모델링을 하면서 몇 달을 집 근처 미용실로 다니면서 그곳을 지나다닐 일이 없었다가 다시 가 보았는데, 차량 신호는 비보호로 바뀌고 신호등은 꺼져 있었다. 아마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또 다른 누군가가 민원을 넣은 모양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널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어르신이 내 옆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셨다. 왼쪽 오른쪽을 살피며 차가 뜸해진 틈을 타서 속으로 건너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계시던 어르신이 "건너갑시다!!"하고 목소리 굵게 소리를 내셔서 흠칫 놀랐다. 그곳에는 나와 그 어르신 두 명뿐이다. 그렇다면 나를 향한 외침이다. 횡단보도 위에서 발걸음을 맞추듯 그분과 나란히 걷고 있는 나. 맞은편 횡단보도 끝에서 나는 오른쪽으로, 어르신은 왼짝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걸어간다.


"건너갑시다" 한마디에 '어? 뭐지?'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나는 횡단보도를 이미 다 건넜다. 헤어질 때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했어야 했나. 머릿속에는 '건너갑시다' 한마디가 계속 맴돌았다. 그분은 왜 그렇게 말을 하셨을까. 내가 좌우를 살피고 망설이는 것을 보셨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건너는 분일까.


아직 초등학생이 두 아이들 둔 엄마로서 나는 아이들과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켜져도 마음속으로 3초까지는 세고 건너라고 한다. 그리고 신호등이 꺼진 횡단보도는 건너지 말고 운동 삼아 신호등이 켜진 곳으로 건너라고 한다. 어른인 나도 건너기 어려운 불 꺼진 횡단보도.


아이들이 건너는 횡단보도에 "건너갑시다"하는 목소리를 내는 어른들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인 내가 들어도 이렇게 든든한 것을. 말하는 사람은 의미 없이 하는 말일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따뜻함을 주는 말들이 있다.


 "건너갑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천천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