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아내의 시점
살면서 누군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무슨 말일까. 그 말은 특별하거나 거창한 말이 아니다. 그저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당신 덕분이에요" 같은, 지나가듯 흘렸지만 마음속엔 오래 남는 말들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가까울수록 더 어렵다. 같은 공간을 오랜 시간 함께 살아낸 사이라면 더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줄 알고, 늘 곁에 있으니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다 미뤄둔 말들이었다는 걸.
남편이 요양병원에 살게 된 후부터 나는 이삼일에 한 번씩 남편을 찾아간다. 처음 병실 아니 기거할 방을 배정받았을 때는 혼자서 무료하게 어떻게 생활할까 걱정이 많았다. 항암 치료가 처음이라 의사가 말하는 긴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병원 가까운 곳에 살아야 했다. 가령 열이 갑자기 올랐을 때 다른 해열제를 먹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바로 긴급하게 치료받는 응급실로 와서 왜 열이 나는지 정확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집에서 긴급한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집보다는 전문의료인이 상주하는 요양병원이 안심이 되었다.
남편이 요양병원에 들어간 지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처음엔 그 낯선 풍경 속에 남편을 홀로 두는 일이 마음에 걸려 잠을 설친 날도 많았다. 나라도 곁에 있어야 덜 외롭겠다 싶어 처음에는 병원 근처 딸 집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가 전셋집을 얻어 이사도 했다. 이틀에 한 번씩은 병원에 들락거렸다. 단백질 보충하라고 달걀도 두세 개씩 삶아 가고 남편이 원하는 자잘한 간식도 가지고 간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면서 달라진 게 있었다. 남편이었다. 남편은 병원 사람들과 금세 잘 어울렸다. 그리고 병원 동네 사람들과도 어울려 놀고 있었다. 어떤 날은 내가 가도 병원 동네 친구삼은 사람들과 노느라고 나는 홀로 병원 방에서 무료하게 티브이를 보다가 집에 오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놀란다. 저 사람은 참, 어디서든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안다고. 넉살이 좋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어쩌면 남편은 병원에서조차도 새로운 ‘동네’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병원 생활이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쓸쓸하고 무료하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은 그 안에서도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병원복을 입고, 남편은 그냥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한편으론 대견하고, 한편으론 마음이 이상했다.
어느 날 병원에서 나오는 길, 남편이 말했다.
“이제 병원도 정 붙이고 살만해. 사람 사는 데는 다 거기서 거기야.” 나를 안심시키려 하는 말인지 나도 요즘은 담담히 듣고만 있는다. 나는 늘 이 병원 생활을 일시적인, ‘비정상’적인 상황이라 생각했는데 남편은 그냥 그곳에서도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 사는 데에 특별한 기준이 있나. 어디서든 누군가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것. 그게 삶이지. 그런 남편을 보며 나도 삶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당신, 참 대단해요. 병원이라는 낯선 세상에서도 당신은 당신답게 살아가고 있어요.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아프다고 웅크리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이 참 고맙고, 또 기특하네요.”
요양병원에 있으면서도 살이 포동포동 쪘으면 좋겠는데 살이 찌지 않는다. 물론 환자 아니었을 때도 살은 찌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마른 장작이 잘 탄다는 살 없는 사람에게 하는 유머들을 날리기도 하였다. 환자니까 살이 안 찌겠지만 적어도 빠지면 안 되는데 조금씩 야금야금 살이 빠진다. 그러면 또 면역력이 낮아져서 치료를 건너뛸 수도 있기에 체중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면 나는 혹 밖에서 너무 놀아서 그렇나 싶은 마음에 걱정이 앞선다. 남편은 꼭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같이 나를 걱정시킨다
하루는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다.
“뭐 하고 있어요?”
“그냥 좀 놀고 있다.”
“뚝”
남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양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그러면 그날은 나도 마음이 상해 전화를 하지 않는다. 궁금한 마음을 꾹 참으면서. 예나 지금이나 잔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자꾸 잔소리가 나온다. 미뤄둔 말이 잔소리가 되어 버렸다. 사랑은 늘 말보다 걱정으로 새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