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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규 Apr 25. 2024

수업의 영향력


나는 낭만닥터 김사부를 보면서 인생과 낭만을 배웠다.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내게 의미 있는 '낭만'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었다. 김사부라는 인물의 명언 한 마디 한 마디는 내 뼈를 때렸고, 김사부가 던지는 질문은 나의 생각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나는 이 드라마를 통해, 김사부라는 인물을 통해 성장했다. 

만약 같은 질문과 메시지를, 국내 유일의 트리플보드 의사가 아닌, 아직 본과에 진입도 못한 내 친구가 말했다면 나는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아마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내가 본 친구들은 아직 인생에 대한메시지를 전달하기엔 공부 빼고 잘하는 게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어쩌면 의식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본 김사부는, 나한테 메시지를 전달하고 인생의 가르침을 주기에 충분히 능력 있고 가치 있는 인물이었고, 자기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솔선수범하는 사람이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김사부'의 이야기는 방황했던 나에게 어린 왕자의 여우 같은 이야기가 되어주었다.   


이처럼 내 이야기가 상대방의 인생에 영향을 주려면, 우선 '나'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삶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이미 오랫동안 고민해 보고, 소신껏 살아온 사람이어야 한다. 다양한 선택과 경험을 해보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인정할 만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의 이야기만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충고하거나 개입할 자격이 생긴다. 오지랖만 넓은 나는 아쉽게도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현재의 나는 뭣도 아니다.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해본 적도 없고, 실패를 이겨내고 성공한 경험도 없다. 실패를 겪은 적도, 실패를 통해 지혜를 얻은 적도 딱히 없다. 학점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내가 최고라고 생각되는 분야도 없다. 지식을 전할 자격은 갖추었지만, 지혜를 전할 자격은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여행하는 선생님들에서 나주고등학교로 교육여행을 가면서, 나는 고등학생들의 삶에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기로 또 회피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좋은 수업을 해도,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믿었다. 5일이라는 시간이 짧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인생에 대한 메시지를 전할 자격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고등학생 입장에서도, 나는 선생보다는 몇 살 차이 안 나는 동네 형에 가까웠다. 아직 보잘것없는 나의 이야기는 고등학생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확신했다. 여쌤의 방식 또한 학생들한테 큰 영향을 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 메시지가 영향을 준다는 것 자체도 두려웠다. 내가 생각한 정답이 그들의 정답이 될 수 없을 것 같았고, 학생들의 인생을 책임질 자신도 없었다. 내가 던질 질문에 대한 답은 나도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질문도 쉽사리 던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내 수업에는 어떠한 메시지도 담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나주고등학교 학생들과 좋은 추억을 쌓고 싶었다. 수업 대신 그냥 재밌게 놀고 싶었다. 나랑 같이한 활동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랐다. 소설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 많더라도, 재밌지 않으면, 소설을 읽어봤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여행하는 선생님들의 수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1년 뒤에 다시 나주고로 와서, 내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목표를 갖고, 어떤 재밌는 활동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내가 좋아하는 방탈출 형식으로 활동을 설계하고 진행했다. 이 활동이 학생들의 기억에 더 잘 새겨질 수 있게 방탈출 활동을 복기하는 시간도 가졌다. 


활동을 하면서 제일 즐거웠던 사람은 단연코 나였다. 학생들과 함께 학교 곳곳을 뛰어다니는 것이 정말 재밌었다. 내가 제작한 방탈출 문제를 푸는 학생들을 보면서 뿌듯했고, 누구보다 현재를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이 보여서 오묘했다. 좋은 추억으로 남아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활동이 끝나고 학생들의 like&wish를 읽어봤다. 활동이 재밌었다고 해준 학생들이 많아서 고마웠다. 문제가 너무 어렵다고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한 학생은 이렇게 적었다.

“인생을 살며 겪을 고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이 학생의 말에, 조금 두려웠고, 조금 부담스러웠으며, 아주 조금은 뿌듯했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길 바라며 계획한 수업이었다. 오직 '재미'에 초점을 맞춘 수업이었다. 그런 수업으로부터 배우는 학생이 있었고, 내가 수업을 설계함에 있어서,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잘 생각해 보면, 내가 학생들은 조금 무시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영향력을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 사람마다 같은 이야기로부터 다른 것들을 배운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여행하는 선생님들'은 아직 인생에 대해 메시지를 전달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우리는 뭣도 모르는 대학생일 뿐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낭만 닥터 김사부’로부터 내가 받은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보다 더 많이 배웠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배운 게 없을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칠 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무엇을 배워갈지는 배우는 사람이 결정한다. 나는 배워갈 학생들을 충분히 믿지 못했지만, 몇몇 학생들은 알아서 잘 배워갔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대전으로 돌아오면서, 여행하는 선생님들이 할 수 있는,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는 학생들에게 여행하는 선생님들이 그냥 좋은 추억을 남았으면 좋겠다. 좋은 인연으로 남아 오랫동안 추억 삼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좋은 추억으로 남아, 은은하게 학생들이 고등학생 때를 떠올릴 때, 가끔 생각나는 그런 단체로 기억되면 좋겠다. 학생들의 성장을 목표로 최선을 다하기보단 학생들과의 추억을 위해서 노력하는 동아리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추억이 쌓이다 보면, 그 추억으로부터 배우는 학생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여쌤은 그냥 여쌤의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느꼈다. 여쌤의 이야기 혹은 나의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여행하는 선생님들도, 한 학생의 '낭만 닥터 김사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학생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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