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시리즈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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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아마추어>(1979)에서 어떤 한 영화제 관계자가 주인공에게 비둘기는 어떻게 촬영했냐고 묻는다. 이에 주인공은 그저 우연히 거기 놓여있어서 찍었을 뿐이다. 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처음엔 우연히 찍힌 비둘기가 날아가자 비둘기가 떠난 시점부터 주인공은 빵가루를 가져와 비둘기를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퀀스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관을 상념한다. 그리고 영화 <아마추어>의 주제 의식이 카메라가 보여줄 수 있는 면과 보이지 않는 진실적 이면을 주제로 택한점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론적 방향성을 완연히 상념하는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카메라의 힘의 본질을 탐구하며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둘기의 빵가루처럼 우연을 가장하여 화면을 포착하는 작가임에 분명하다. 애초에 우연과 영화라는 단어적 결합은 모순에 가깝다. 두 단어는 도저히 한데 어우러지지 않는다. 먼저 우연이란 두 가지 이상의 원인을 가지고 독립된 사건 혹은 사고가 서로 관련 있어 보이는데, 실제로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말한다. 그럼 영화는 어떠한가. 영화는 이야기부터 숏, 그리고 편집의 과정을 걸쳐 감독이라는 창작자의 손에 철저히 계산되고 촬영되며 편집으로써 연결된다.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우연이라는 단어와 철저히 상관관계로만 이루어진 영화라는 매체는 전혀 다른 지점에 서서 독립된 상태로서 굳건하다. 이러한 지점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 중, 각각 <세 가지 색 블루>(1993), <세 가지 색 화이트>(1994), <세 가지 색 레드>(1994)에서 보여준 꽤나 큰 성취를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본 영화들은 앞서 말한 우연의 모순을 의도적으로 연결 지으며 영화적, 그리고 미학적 아름다움을 진취적으로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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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고 있는 자동차 바퀴, 공항 검색대를 지나는 캐리어, 몇 번에 걸쳐 울리는 전화기. 이 화면들은 세 가지 색 연작의 각 첫 장면들로 장식된다. 여기엔 장식이라는 꽤나 직접적인 단어가 어울린다. 왜냐하면 세 작품 모두 의도적으로 영화의 첫머리에 주인공이나 인물이 아닌, 생명력이 없는 사물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달리고 있는 자동차 바퀴를 살펴보자. <블루>의 첫 장면이다. 이 장면 뒤로 자동차 아래 오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서스펜스적 불안한 화면을 배치하더니 그 이미지의 후면에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크나큰 자동차 사고로 이어지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서 보면 오일이 떨어지는 장면이 중요하지 첫 장면에 보여준 달리고 있는 바퀴는 꽤나 의미 없는 장면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공항 검색대를 지나는 캐리어는 <화이트>의 첫 장면이다. 캐리어는 이야기를 진행함에 있어 주인공을 폴란드로 돌아오게 해주는 장치로써 작게나마 역할은 하지만,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생뚱맞게 법정에 서 있는 주인공과 교차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장면의 시간적 상관관계가 없다. 다음으로 몇 번에 걸쳐 울리는 전화기는 <레드>의 첫 장면이다. 몇 번의 전화벨이 울리다가 카메라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전화기의 배선을 따라 쫓는다. 아마도 전화의 전기신호가 지나는 것을 포착해내려고 한 것 같지만 너무나 유려한 카메라 무빙에 기괴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이 세 장면을 살펴보면 문제는 이제부터 생긴다. 시리즈적으로, 이야기적으로 첫 장면에 배치한 의도적 사물들과 이후의 화면들은 크게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지 않다. 설령 이루고 있다고 한들 그 깊이가 매우 얕다. 실제 세 작품 다 프로덕션 기간이 시일 내 가깝게 촬영하고, 프랑스 혁명 이념을 모티프로 하여(블루는 자유를, 화이트는 평등을, 레드는 박애를) 만들어진 기획된 시리즈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화의 첫 말미를 사물로 배치된 것은 절대적으로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색 시리즈의 첫 장면들의 각 영화별 상관관계를 의도적으로, 비평적 연결로서 바라본다면 조금 모호하고 어려운 지점이 있지만, 이들을 각각의 독립된 영화로서 본다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키에슬로프스키는 영화의 첫 화면으로서 굳이 사물을 보여준 것일까. 오히려 키에슬로프스키는 자신이 다루는 영화라는 미학적 세계에서 사물이 첫 화면을 장식한다는 것은 크게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전에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은 노동자 계층과 그 인물들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작가였다.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는 극영화로 넘어오면서 조금 다른 행보들을 보인다. 키에슬로프스키를 세계적 감독으로 만들어준 <데칼로그>(1988) 시리즈부터 대표적으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그리고 지금의 <세 가지 색>(1994) 시리즈까지. 키에슬로프스키는 인물 자체의 존재론적 해방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쉽게 말하면 인물이 이야기 속 어떠한 갈등 요소와 장애물을 만나고 이를 극복해 나가면서 직접적으로 인물들이 자체적으로 해방하진 않는 것이다. 오히려 외적인 요소가 나오는데, 예로 데칼로그의 종교적,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의 판타지적 영화 장치처럼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미학적 성취로서 창작자가 영화 속에 적극 개입해버렸을 때 그제야 인물이 비로소 해방되는 것이다. 이를 키에슬로프스키는 의도적으로 인물들을 그저 우연한 상황 속에 풀어 놓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 사이에 인물과 사물을 이분법적 구분을 짓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에서 앞서 말한 상충되는 메시지적 결과들을 가져오게 만들고 있다.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우연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우연 속에 영화는 인물 또는 사물의 구분 없는 수평적 객관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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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블루>를 살펴보자. 앞서 오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서스펜스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 후면에 주인공들이 차를 타러 오고 있는 것은 앞서 얘기한 바 있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결함이 있는 차를 타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켄다마를 하고 있는 한 남자가 나온다. (켄다마는 공을 나무 막대기 위에 올리는 장난감이다) 여기서 켄다마를 하고 있는 남자와 주인공 가족들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켄다마라는 사물적 장치마저 그저 갑자기 나오며, 그저 우연히 놓인 인물이 나온다. 몇 번의 켄다마를 실패하다가 그 남자는 히치하이킹을 하는데, 주인공 가족은 이를 무시한다. 그렇게 남자는 아쉬워하며 다시 켄다마를 하고 있다. 그리고 켄다마 위에 공을 올리는데 성공하면 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주인공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하며 비극을 맞게 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런 우연한 방식을 계속해서 시도한다. 예로 들면 이런 것이다. 만약 주인공 가족이 히치하이킹 하는 남자를 태워줬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태워주진 않았더라도 켄다마를 하고 있는 남자가 켄다마 위에 공을 올리는데 실패를 했더라면 주인공 가족은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하는 이런 우연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블루>에서 이런 우연한 딜레마는 한차례 또 나온다. 주인공 줄리(줄리엣 비노쉬)는 집 밖에 폭행 당하는 남자가 아파트 내부로 도망쳐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남자마저도 영화의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으며 전혀 주인공 줄리는 모르는 인물이다. (이 남자는 이후에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층마다 한차례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줄리는 집 안에서 고민한다. 문을 열어주느냐, 안 열어주느냐. 그렇게 고민하던 줄리는 결국 열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남자는 사라진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줄리가 밖의 남자의 행태를 살피러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창문 밖에 들어오는 바람에 집 문이 닫혀버리고 줄리는 들어가지 못한다. 만약 줄리가 문을 열어줬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니면 그저 모른 척 무시하고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하필 행태를 살피러 나갔을 때 복도의 문이 닫혀있었더라면 집문은 잠기지 않았을까. 이런 우연한 딜레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연한 과정이 있었기에 아랫집 남자가 옆집의 창녀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빌라의 내부 사람들은 그런 창녀를 내쫓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로 연결되며 전진한다. 켄다마 남자는 영화에 한차례 더 나오긴 하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영화적으로 중요한 장치나 인물로서 활용되지 않는다. 단지 우연히 놓였을 뿐이다. 죽은 남편과 불륜을 했던 젊은 여자 변호사가 임신한 것도 단지 우연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새로운 아이를 잉태하고 그런 뻔한 방식이 아니다.) 그럼 <화이트>에서는 어떨까.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 카롤(즈비그니브 자마코브스키)과 도미니크(줄리 델피)의 법정 장면에서 잠시 <블루>의 주인공 줄리가 등장한다. <블루>에서 죽은 남편과 불륜한 젊은 변호사를 찾으러 법정을 찾은 이야기와 영화 <화이트> 오프닝과 연결되며 공명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시리즈성의 미학적 시도와 시리즈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이러한 성질의 시발점을 알린다. 다시 <화이트>로 돌아가 보면 영화 속 주인공 카롤에게 큰 기폭제가 되는 니콜라이와의 모든 것은 우연 속에 놓인다. 노숙을 하는 카롤의 옆에 뜬금없이 니콜라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돈 한 푼 없는 카롤에게 도움을 주는 선의의 니콜라이와의 우연한 만남은 그렇게 다시 이야기가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영화의 첫 머리에 등장했던 캐리어에 몸을 숨겨 카롤은 폴란드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 과정 또한 순탄치 않다. 어느 도둑들이 이 캐리어를 훔치는 바람에 니콜라이와 재회하지 못한 채 외딴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도 ‘우연한 어떤 도둑’이 작용된다. 그러면 이런 지점에서 누군가는 분명 반문할 수 있다. 이런 우연한 사고와 사건의 자잘한 반복이라면 여느 영화와도 똑같지 않느냐라고 물을 수 있지만, 전혀 아니다 라고 얘기하고 싶다. <세 가지 색>이 보여주고 있는 방식은 그저 단순히 핍진성에 의거한 단순 사고와 사건의 배열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러한 우연한 인물들을 우연한 상황 속에 ‘의도적’으로 던져 놓고 이야기의 추진력을 얻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세 가지 색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사물과의 관계성이나 이야기나 화면의 충돌이 상응하거나 반응하지 않는 개연성 문제로 직결된다. 이들은 그저 연결되며 장치적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그저 우연히 진행되는 것임을 기반한다. 어렵게 다시 폴란드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카롤은 그 곳에서 얻은 일 자리에서 큰 공장이 들어설 부지의 정보를 우연히 듣게되어 훔치게 된다. 그렇게 성공한 카롤의 이야기로서, 자신을 버린 도미니크의 리벤지 무비를 향하는 이야기로서 발돋움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처럼 키에슬로프스키의 이야기는 철저히 우연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점진적 에너지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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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영화 이론가 루돌프 아른하임(1904~2007)은 “영화는 연극보다 시공간상의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며 이를 간략히‘부분적 환영’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카메라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앵글에서 찍힌 사진들을 하나씩 잇는 작업을 한다. 이는 ‘부분적 환영’으로서 관객에게 설득된다.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가, 전혀 다른 공간에서의 연결이 자연스레 뇌리에 박혀 기억되고 공감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레드>는 참으로 숭고하며 경이한 위치에 놓여있다고 감히 말할만하다. 이런 ‘부분적 환영’을 토대로 우연한 영화의 가능성의 실천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레드>의 발렌틴<이렌 자코브>의 첫 등장과 함께 사랑하는 남자 미쉘과 전화하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이 <세 가지 색> 시리즈가 공명하고 있음을 알린다. 미쉘은 폴란드에서 자동차를 도난당해 모든 걸 잃어버렸는데, <화이트>의 선의의 남자 카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레드>에서 이 세 시리즈의 완결성과 영화라는 매체는 우연의 산물임을 방증하듯 꽤나 본격적인 영화적 구성을 시도한다. 이야기는 마즈루카식의 구성 방식을 택하는데, 영화를 시작하는 두 인물은 오프닝 시퀀스에 의도적으로 보여주지만 영화 속 마지막까지 전혀 만남의 기색조차 없다. 그저 인물들을 배치해 우연적으로 동선과 상황을 연결해놓을 뿐이다. 영화는 첫 사물인 전화기와 함께 앞서 말한 발렌틴이 아닌 그녀의 옆집 남자로 시작한다. 관객이 이 남자가 주인공이 아닌 것은 머지않아 금방 알아챈다. 영화의 사건의 중심에서 이행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화면을 우연한 방식으로 나오며 화면을 장악해나간다. 예를 들면 이런 방식이다. 앞서 말한 발렌틴이 미쉘과 함께 전화하는 장면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화면의 끝에는 옆집 남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는 발렌틴의 화면으로 끝이 난다. 그렇게 첫 장면에서의 전화 회신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와 빨간 차를 이끌고 나가는데. 그 화면의 끝에는 다시 발렌틴이 집에서 나오게 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패션쇼를 끝마친 발렌틴이 차를 이끌고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횡단보도에서 책을 떨어뜨리는 옆집 남자가 나온다. 이처럼 영화의 첫 머리에 등장했던 이 옆집 남자는 그저 우연히 화면에 놓여있던 인물이다.
영화에서 가장 큰 사건은 발렌틴이 차로 우연히 치었던 리타라는 강아지다. 이 강아지를 통해 강아지 주인인 노판사(장 루이 트린티냥)을 만나게 되고 이야기는 전진한다. 발렌틴은 다친 강아지 리타를 데리고 찾았던 동물 병원을 찾는다. 여기서 보조 수의사 이름은 마크인데 이는 발렌틴의 친동생의 이름과 같다. 그저 같을 수도 있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 보조 수의사의 이름이 불릴 때 발렌틴이 흠칫하는 표정을 클로즈업 샷으로 보여준 게 중요한 맥락인 것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이름을 부여했다는 방증이다. 영화 속 발렌틴은 아픈 어머니 곁에 어린 동생만을 두고 와 동생 마크에게 미안하고 걱정 가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보조 수의사 마저도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그저 스쳐지나는 우연적 인연에 불과하다. 이처럼 키에슬로프스키의
<세가지 색> 영화들은 ‘부분적 환영’을 우연에서 기인하고 있다.
세 가지 색 시리즈 모두 우연에서 기인하며 이야기의 중심적 맥락이나 사물의 연관성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우연히 놓여있는 것들에서 맥락을 찾는다. 사물들과 인물들. 그리고 겹겹이 겹쳐있는 삶 속에서 말이다. <레드>는 이 시리즈의 종결의 예언하는 듯 우연적 기인함은 조금 더 폭발적으로 발현하는 것뿐이다. 도청을 하며 노후를 보내는 노판사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가 이해하게 되는 발렌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수를 하고 더 이상 도청하지 못하는 노판사의 상황 속에서도 집에 날아드는 돌멩이가 중요한 것이다. 이때도 화면은 기괴하리라 만치 빠른 속도로 무빙하며 그렇게 집 안에 모인 돌멩이들을 비춘다. 그럼 이 돌멩이들의 ‘부분적 환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는 단순히 전화와 도청, 죄와 돌멩이라는 속죄의 이분법적 단순한 사고를 예언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복잡한 영화적, 미학적 심연이 담겨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들은 관객이라는 개인의 사고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음을 말이다.
영화의 말미에 발렌틴과 노판사의 대화에서 노판사는 어느 날 들고 있던 책 끈이 끊어져 떨어진 책 속의 한 부분이 시험에 나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이에 반응하듯 위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는 기괴한 화면을 만든다. 그리고 이내 태풍이 불어오더니 문을 닫으러 가는 발렌틴을 등 뒤로 카메라가 쫓는다. 이처럼 키에슬로프스키의 단순한 영화적 우연은 바깥의 태풍의 에너지와 상응한다. 태풍과 바람은 우연히 부는 것이다. (여기서는 과학적 근거에 얘기하는 바가 아니다.) 신이라는 창작자가 의도적으로 어떤 날씨 버튼을 누르는 방식같이 태풍을 불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영국에 있는 미쉘을 만나기 위해 떠나려는 발렌틴에게 노판사는 페리호를 타고 갈 것을 권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 밖의 우연한 폭풍우를 만난 페리호는 전복되고 천명이 넘는 승객이 사망하는 사고 보도를 보게 된다. 그중 단 7명만이 극적으로 구조의 성공하게 되는데, 세 가지 색 시리즈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느껴지는 시리즈의 마지막 대목으로서의 큰 울림과 감동의 무게는 버거울 정도로 숭고하다. 우연과 필연을 넘나들며 키에슬로프스키적 ‘부분적 환영’을 성취하는 엔딩 장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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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을 넣는 늙은 할머니는 <세 가지 색> 시리즈의 모든 장면에 한 숏트로써 할애된다. <블루>의 줄리의 앞에서, <화이트>의 카롤의 앞에서, <레드>의 발렌틴의 앞에서 나온다. 이 하나의 장면으로 이 <세 가지 색> 시리즈의 공간과 시간은 공명한다. 이 할머니가 이 세 모든 영화에 나오는 같은 할머니냐는 질문은 이 대목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영화는 느릿느릿 걷는 할머니가 공병을 넣으러 가는 이 행위 자체를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 더 초월적인 영화적 우연함을 발현하고 있다. 할머니의 존재는 무엇일까. 단지 영화 속 캐릭터를 묻는 것이 아닌, 영화가 말하고 있는, 이 할머니와 상응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저 단순히 우연히 놓였다기엔 이 시리즈를 한데 묶어놓고 있는 의도적 우연함이다. <블루>의 줄리와 <화이트>의 카롤은 이 할머니를 두고 바라만 봤다. 하지만 <레드>의 발렌틴은 직접적으로 할머니의 행위를 돕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레드>가 세 시리즈의 완결성과 영화라는 매체는 우연의 산물임을 방증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 우연적 공명에 발렌틴이 직접적으로 행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에 개입하는 것, 우연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바꿔놓는 것. 그것은 곧 신(창작자)의 영역이다. 우연히 부는 태풍과 자연재해에 대비해야 하는 인간처럼 우리는 연약하다. 생명력 없는 우연히 놓인 사물들과 생명력이 깃든 우연히 세상 속에 던져진 인간들이 공명하는 것처럼 <세 가지 색> 시리즈의 이 영화들은 독립적으로 굳건한 채 공명하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우연을 다루는 영화적 방식의 시도와 이로 이룬 미학적 성취는 참으로 아름답다. 발렌틴이 할머니의 행위에 관여한 것처럼, 키에슬로프스키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우연을 철저히 상관관계로 이루어진 영화라는 예술과 융합하여 그 속에 관여하고 있다. 한 명의 감독으로서 하나의 영화 속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과 그 속에 세상의 신처럼 태풍을 불게 하고 어느 날엔 연약한 인간들을 구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은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라며 우리 인간은 그저 세상에 던져진 우연한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지금은 작고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존재론적 영화관과 일정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렇게 우연히 세상 속에 던져졌던 키에슬로프스키는 앞으로도 영화로서 영원히 건재하며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