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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준혁 Sep 27. 2024

시선의 미학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들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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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감독 아오야마 신지가 기획한 『영화장화』(2018)의 대담에서 스필버그를 이렇게 평한다. “영화의 양극단의 한쪽에는 장 뤽 고다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다. 그리고 그 중간을 조율할 수 있는 감독으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있다”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하면서 깊다. 헐리우드의 전통적 서사 방식을 보수적으로 고수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이에 반대로 영화를 다르게, 영화라는 영상 매체를 조금 더 진보적으로 활용했던 누벨바그와 장 뤽 고다르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스필버그는 정확히 그 중심에 있는 감독이다. 그는 작가이자 만능의 엔터테이너로, 헐리웃의 시스템을 철저히 이용하면서 작가의 시선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스필버그는 어떤 시선의 미학을 지니고, 어떤 방식으로 영화의 깊이를 부여하고 있을까. 아마도 이를 키워드로 나눠보자면 동화와 역사, 그리고 영화 그 자체일 것이다. 스필버그는 보편적 감동을 지닌 동화적 서사의 매력을 잘 알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필버그는 <에이 아이>(2001)를 시작으로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역사 속 과오를 가감 없이 극화하며 드러내는 냉철함을 잃지 않는다. 예로 <쉰들러 리스트>(1994)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뮌헨>(2006)이 있다. 마지막으로 스필버그의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창작자의 시선과 창작성 그 자체를 비추고 있다. <죠스>(1978), <이티>(1984), <우주 전쟁>(2005) 그리고 최근작 <파벨만스>(2023)까지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체 자체의 창작성과 그 매력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비평문에서는 스필버그의 2000년대 이후의 영화들 중 분기점으로 나눠 볼 만한 영화 세 편을 가지고 얘기하고자 한다.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도, 동화 서사를 통해 미래를 얘기하고자 했던 <에이 아이>(2001) 그리고 편견 없이 과거 속 사건을 통해 이미지의 객관화를 시도했던 <뮌헨>(2006), 마지막으로 창작자의 시선이 곧 영화로 극화된, 스필버그의 일대기를 다룬 <파벨만스>(2023)에서 현재를 중심으로 스필버그의 시선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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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이 아이>(2001)는 인간이 로봇과 함께 생활하는 근 미래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는 인간의 끝없는 기술 개발을 통해 악화된 환경 문제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식량 문제로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가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 수준을 가진 선진국의 사람들만 살아남는다. 여러 환경 문제의 이미지와 함께 정부는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신을 규제했다는 나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임신을 규제하니 인구는 줄어들고 인간은 외롭다. 연애 로봇이 사랑과 성욕을 대신하고 자식이 없는 가정에는 로봇 아이가 자식을 대신한다. 영화는 최초로 사고할 수 있게 특수 제작된 로봇 아이 ‘데이빗’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근 미래의 이미지를 다루면서 이야기는 전통 동화 피노키오의 서사를 따르고 있어 꽤나 흥미롭다. 이처럼 영화는 피노키오의 전통적 알레고리를 가져오면서, 미래의 로봇 아이 데이빗이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은,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한 역설적 여정이 시작된다. 영화의 첫 장면은 빗방울이 맺힌 불투명한 유리 벽 뒤로 데이빗을 만든 회사 ‘사이버 트로닉스’의 인간 흉상을 비추며 시작한다. 카메라는 무언가를 비추지만 어두스름한 형태만 보일 뿐 실제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가 서서히 빠지면 근 미래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첫 번째로 스필버그는 시선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여과의 방식을 택한다. 영화란 매체는 유독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중요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분명 그렇지 않은 영화들도 있다.) 이를 이분법 하여 구분 지어 보자면 산업적으로 영화의 첫 장면은 반드시 흥미를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은 TV의 채널을 돌리지 않거나 영화관을 나서지 않을 거라는 이유에서다. 반대로 작가적으로(산업의 반대말로 쓴다면)의 첫 장면은 단순한 흥미 이외의 것들이 시도되는데, 영화라는 영상 매체 자체를 이야기의 구조나, 아니면 숏이거나, 혹은 편집적으로 실험하고자 하는 작가 정신의 미학적 탐구일 수도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를 두고 “영화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숏을 하는 영화와 숏을 못하는 영화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유독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설계하거나, 어쩌면 설계하는 척 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스필버그의 첫 장면은 어떠한가. 환경 문제의 이미지나, 임신 규제의 나레이션이 나오는 오프닝 시퀀스를 제외하면 영화의 첫 장면은 이전에 말한 불투명한 형상의 이미지일 것이다. 감독은 왜 굳이 보이지 않는 불편한 이미지를 제시했을까. 왜 인물이 아닌, 불투명한 인간 흉상을 제시 했을까. 이는 영화의 끝으로 도달했을 때, 첫 장면이 어떠한 연유에서 여과되고 시작되었는지 설명된다. 진짜 아들 ‘마틴’이 불치병에 걸려 냉동되어 있을 때, 마틴의 자식 대용으로 로봇 데이빗을 집에 들인다. 데이빗의 등장하는 첫 장면은 영화의 시작이었던‘사이버 트로닉스’사의 불투명한 인간 흉상을 비추는 방식과 똑같다.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아웃 포커싱을한다. 엄마와 데이빗의 첫 조우를, 엄마가 데이빗을 바라보는 시점 샷을 의도적으로 망가뜨린다. 이러한 이미지의 여과는 영화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로봇’을 철저하고 분명하게 구분 짓고 있음을 알린다. 수영장 시퀀스에선 데이빗을 장난으로 물속에 넣어보려는 못된 아이들로 인해 많은 영화에서 뻔하게 발생 되는 로봇 특유의 어떤 방어 기재 시스템이 등장한다. 이는 퇴원하여 돌아온 진짜 인간 아들 마틴을 죽일 뻔한 사고로 이어진다. 물속에 빠진 마틴을 구하는 어른들을 등 뒤로 카메라는 버드 아이 샷(bird’s eye shot)으로 쭉 빠지며 일렁이는 물속의 혼자 남겨진 데이빗을 비춘다. 여기서도 로봇 데이빗은 물 밖의 인간들과 철저히 구분되며 불투명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이처럼 스필버그는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여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지는 곧 시선이다. 영화 속 이미지는 감독이라는 창작자가 의도적인 숏과 편집을 통해 의도적인 이미지와 시선을 관객에게 던져준다. 이는 <에이 아이>의 로봇축제 시퀀스에서도 절실히 드러난다. 먼저 로봇축제는 이용 가치가 없는 로봇들을 사냥해서 잡아다가 무자비하게 고문하거나 잔인하게 해체하는 축제다. 인간이 아니고 로봇이기에 서사 속 폭력은 그리 잔인해 보이진 않다. (이 또한 이 비평문이 인간의 시선으로 적힌 글이라 그럴 수 있다) 인간들은 달 모양을 가진 비행선을 타고 다니며 로봇을 사냥하는데, 그렇게 잡혀 온 로봇들은 한데 모여 학살의 순서를 기다린다. 재밌게도 학살에는 의도적인 순서가 있다. 최대한 로봇처럼 안 보이는, 불쾌한 골짜기에 가까운 로봇들 먼저 고문당하고 살해당한다. 전기톱으로 몸을 자르고 사지가 찢긴다. 인간과 닮은 로봇일수록 제일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과 닮을수록 죄의식을 느끼는 걸 알 수 있다. 근거로 데이빗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한 소녀 아이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 소녀 아이는 행사장 간부인 아빠를 찾아가 감옥에 어린 남자아이가 갇혀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영화에서 중요한 지점이며 스필버그가 관객에게 던지는 시선이기도 하다. 여자아이의 눈엔 데이빗이 로봇이 아닌 사람 아이로 보이는 것이다. 어른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겪어온 관습과 관행의 경험으로 세상을 여과하며 바라본다. 미래란 과거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과거가 모여 미래가 된다. 스필버그는 <에이아이>를 통해 미래를 다루면서 과거의 동화 서사를 택한 지점은 이런 사소하고 단순한 지점에 있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역설적 감동과 영화적 에너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이 지나고 인간처럼 말하는, 인간처럼 보였던 데이빗은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다가 지금껏 스필버그가 쌓아온 이미지의 여과가 뒤집히는 순간이 온다.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의 끝에는 데이빗을 만든 ‘사이버 트로닉스’ 사가 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마주해 충격 받은 데이빗은 곧이어 영화의 첫 이미지였던 불투명한 흉상의 옆에 놓인다. 이번에는 카메라가 로봇이라는 키워드로 한데 묶여 여과 당했던 흉상과 데이빗을 직접적으로 함께 두고 바라본다. 꽤나 노골적으로 비추는데, 건물 외벽에 놓인 그 둘을 담는 카메라는 공중에 떠 있다. 인간이 아닌, 제 3자의 시선으로까지도 보인다. 즉 창조자의 시선이다. 여기서 창조자는 신일 수도 아니면 영화의 창조자인 감독의 시선일 것이다. 곧이어 데이빗은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데이빗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로봇은 주체적 자살을 할 수 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카뮈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은 자살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존재철학의 근본 문제를 답한다고 했다. 데이빗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달았을 때 물속에 몸을 던지는 판단을 한다. 데이빗의 주체적 자살을 통해 이후부터 데이빗을 비추었던 불투명한 카메라는 전복된다. 이미지는 여과 없이 그대로 담아내는 방식을 택한다.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미래의 미래가 찾아와 지구엔 인류가 멸종한다. 영화 속엔 외계인들까지 찾아온다. 인류의 기억을 가진 데이빗을 위해 외계인들은 데이빗이 그토록 원하던 엄마를 하루 동안 복원해주는데, 이는 데이빗의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 아빠인 헨리도, 진짜 아들인 마틴도 없는 엄마와 단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 속엔 따뜻한 정서가 흐른다. 그동안 여과되었던 수많은 불투명한 이미지들은 사라지고 거울과 카메라는 데이빗을 직접적으로 비춘다. <에이아이>(2003)는 단순하다. 미래에서 과거를 보며, 과거를 통해 미래를 얘기한다. 결국 데이빗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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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2005)은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벌어진 참사와 그 뒤에 이어진 모사드의 검은 9월단에 대한 보복 암살 작전(신의 분노 작전, Operation Wrath of God)을 다룬다. 1972년의 사건을 가져와 2000년대의 스필버그는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영화의 오프닝엔 이스라엘인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팔레스타인들(검은 9월단)의 모습을 보도한다. 우선 저널리즘의 속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널리즘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공공적인 사실이나 사건에 관한 정보를 보도하고 논평하는 활동이다. 하지만 정보의 객자나, 보도하는 객자 또한 결국 사람이다. 많은 역사에서 언론 윤리 강령을 내세우며 언론인들의 도덕적 저널리즘을 강조하지만, 결국엔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완전한 것은 없다. 사실적 정보를 가져와도 결국 사람과 매체를 통해 반드시 여과되고 가공되기 마련이다. 그곳에 진실은 무엇인가?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도 수십 개의 미디어 언론 영상과 기자들을 통해 가공된다. 예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는 “독일군에 의해 팔레스타인들(검은 9월단)은 전멸했고 인질은 전원 무사하다”라며 보도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거짓이었다. 실로 인질은 전원 사살되었다. 그러면 이 보도는 어디에서 왔을까. 1972년의 실제 뉴스 보도를 보고 2014년의 세월호 참사의 오보가 떠오른다면 그건 과연 우연일까. 과거와 현재는 크게 다를 것이 없음을 확인한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 양식과 형태가 바뀔 뿐이다. 스필버그는 <뮌헨>의 실제 참사를 기술적 여과 없이 단지 재현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이전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4) 에서도 시도한 바 있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하는 편집 기법을 활용해 현대의 살아있는 유대인까지, 즉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의 잔상은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현존하는 실체가 분명히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뮌헨은 약간 다르다. 이어져 오진 않지만, 스필버그는 결국 사람이란 건 매번 똑같고 그로 인해 발현되는 역사적 사건은 “현재는 과거로부터의 반복된 학습이다.”라며 메시지를 던진다. 이를 통해 <뮌헨>의 스필버그는 카메라의 객관화를 시도한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그렇다. 영락없는 젊은 청년들로 보이는 팔레스타인들은 술 취해 숙소로 복귀한 미국 선수들의 도움을 받아 올림픽 숙소로 들어간다. 그리고 환복을 하며 완전 무장한다. 곧이어 카메라는 숙소에서 쉬고 있는 이스라엘인들과 총을 들고 진입하는 팔레스타인들을 교차로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어떤 직접적인 숏은 없다. 렌즈의 심도를 통해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심도가 깊은 렌즈를 사용함으로써 카메라의 객관화를 이룬다. 이처럼 영화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을 편 나누지 않으며 인간 대 인간으로서 재현하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인간의 원죄 의식을 다루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참사 이후 이스라엘의 대외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복수를 계획한다. 검은 9월단을 살해 및 피살하기 위해 조직원을 모색하는데, 이에 아브너는 평범하다는 이유로 차출되어 팀의 리더 역할을 맡는다. 여느 스파이 영화와 똑같이 가족도 모르고 존재 자체를 지우고 활동해야 한다는 지령을 받고 오른 비행기에서 아브너는 뮌헨 참사의 과거를 본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뮌헨 참사의 학살 장면을 비행기의 창문을 통해 재현한다. 영화 속 아브너는 실제 과거를 알지 못한다. 뮌헨 참사를 언론으로만 접하였기 때문에, TV 화면에서 본 짧은 순간의 단상이나 상상적 재현일 뿐이다. 그러면 스필버그가 관객에게 보여준 과거 장면은 어떤 재현이었을까. 영화를 통해 발현된 아브너의 얼굴과 뮌헨 참사의 실재적 제현은 영화 속 객관화된 간극적 공명을 만든다. 아브너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적으로 관객에겐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모사드의 새 암살단의 첫 모임은 비장함도, 어떤 두려움도 없다. 단지 술을 마시며 웃는 청년들만 있을 뿐이다.

스필버그는 과거를 객관화하는 방식으로 카메라뿐만 아니라 서사적인 측면에서도 작용한다. 분야별 전문가들로 이뤄진 팀의 주된 목적은 뮌헨 참사의 가담한 팔레스타인 인사 11명의 제거 임무를 맡는다. 그렇게 영화는 한명 한명 팔레스타인 인사들을 찾으러 가 살해하는 과정을 다루는 일종의 살해 로드무비 형태이다. 첫 표적인 와엘 즈와이터를 암살하러 가는 장면에서도 모사드의 암살자들은 어설프다. 분야별 전문가라고 불러 만든 조직이지만, 역시나 살해는, 남을 해치는 건 서툴다. 총을 꺼내는 모습이며, 적을 암살하기까지의 과정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영락없는 평범한 인간들이다. 두 번째 표적 함사리를 살해하러 간 작전에서는 딸이 방해물로 작용한다. 수화기를 들면 터지는 폭발 장치를 설치했지만, 어린 딸이 수화기를 들고자 하는 모습에 작전은 중지된다. 이처럼 팔레스타인 인사를 살해하려 모인 모사드의 전문 조직은 ‘살해’라는 행위 자체의 죄의식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들로 비추고 있다. 살해 로드 무비를 통해 영락없는 인간으로 비춘 건 모사드의 조직뿐만 아니다. 갖갖의 에피소드를 만나다 보면 참사에 가담한 일명 ‘가해자’였던 팔레스타인 인사들은 너무나 평범하다. 가족이 있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있고, 문화와 예술을 나누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대칭되는 객관적 서사와 카메라는 아브너와 조직원들의 살해 행위에 갈등을 느끼게 한다. 영화가 끝으로 에브너는 모든 조직 생활을 끝마친다. 모사드로 돌아오라는 상관의 명령에도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존재가 지워진 아브너는 상관 에브라임의 고향(모사드)로 돌아오라는 말에 “집에서 저녁 먹어요”라며 거절한다. 이에 에브라임은“싫어”라고 대답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아마도 아브너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 어느 곳에도 아브너의 기록은 없기 때문에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다. 이제 아브너의 과거는 없다. 현재라는 실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관계가 가까워지면 죄의식을 갖는다. (앞서 적은 <에이아이>의 학살의 순서와도 비슷하다) 에브라임은 아브너와 저녁을 먹지 않아야만 죄의식 없이 처리할 수 있다. 정치와 사상, 그리고 전쟁 속에는 사람들이 남는다. 결국엔 사람이 계획하고 진행하며 사람이 살해하고 사람이 다친다. 어쩌면 보잘것없는 연약한 사람들뿐이다. 이처럼 스필버그는 영화 <뮌헨>(2005)을 통해, 실제적 과거의 참사를 통해 결국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은 자연과 과거의 역사 속에 한없이 나약하다. 역사에서는 과거의 시행착오를 통해 반복되어서는 안될 역사적 과오를 대비하고 방어한다지만, 영화를 보고 현재를 보고 있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떠한 형태로든 변질되어 발현된다. 스필버그는 과거로 회귀하여 결국 현재를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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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꿈이란다. 잊히지 않는 꿈, 보고 나면 너도 모르게 활짝 웃고 있을걸”영화 <파벨만스>(2023)의 오프닝에 새미의 어머니 미치 파벨만이 극장에 처음 가보는 새미에게 말한다. 이에 반면에, 엔지니어인 아버지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새미에게 상세히 설명해준다. 영화의 오프닝처럼 영화는 감독 스필버그의 유년 시절을 다룬 자전적 이야기로 스필버그가 영화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회고한다. 그렇게 처음 가보는 두려움 가득한 극장에서 새미는 세실 B. 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1952)를 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새미는 기차가 충돌하는 장면에서 화면에 흡수될 거 같은 입체감을 맛본다. 새미의 얼굴과 스크린 속 영화는 교차적으로 편집되고 카메라는 점층적으로 새미의 얼굴을 트랙인 한다. 기차와 자동차가 충돌한다는, 실제로도 당시에 충격적일 법한 이 장면은 새미(스필버그)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나 보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이 장면은 이후 <우주전쟁>(2005)에서 외계인 침공 뉴스 보도 속 돌리는 채널에도 삽입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모형 기차를 사다주면 새미는 실제 영화 속 장면을 재현해보기에 앞선다. 그러다가 기차가 고장 나면 엔지니어인 아버지는 이를 고쳐주고 예술가인 엄마는 아빠의 카메라를 가져다주며 기차가 충돌하는 장면을 촬영해서 마음껏 보자. 라고 말해준다. 새미의 아버지는 보수적이다. 감성보다는 이성이, 융화보다는 논리와 원리가 앞선다. 그럼에도 가족에게는 따뜻한 사람이다. 그리고 가족과 자신의 다음을 위해 지역과 회사를 옮겨가며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반면에 (굳이 나눠보자면) 새미의 엄마는 진보적인 사람이다. 캠핑카 라이트 앞에서 자신의 몸이 다 비춘다 해도 가족들과 불륜 관계인 베니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토네이도가 불면 자식들을 데리고 직접 토네이도 앞으로 가서 그 위험을 마주한다. 직관적 경험과 마주함을 중요시하는 사람인 것이다.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두고, 예술가인 어머니를 둔 유년 시절은 스필버그에게 있어 중요한 지점이다. 이는 앞서 “스필버그는 작가이자 만능의 엔터테이너라”는 말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산업이며, 산업이기 이전에 예술이다. 토네이도와 비바람이 부는 차 속에서 새미의 엄마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말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특히나 재미있는 지점이다. 여느 예술 매체와 다르게 영화는 어떻게든 인과 관계를 형성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러 형태의 다양한 시도들을 가진 영화들도 있었다) 창작자는 서사를 만들고 이미지를 촬영하며 결과적으로 편집과정을 통해 이미지를 선택하고 나열한다. 모든 것은 선택, 즉 유기적 인과 관계를 통해 영화는 완성된다. 이처럼 영화 <파벨만스>의 새미(스필버그)는 예로부터 이런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작가적 시선을 만들고 영화적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것의 방증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새미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보이스카우트 친구들과 전쟁영화를 만드는가 하면, 어느 날엔 돌아가신 할머니와 이를 슬퍼하는 엄마를 위해 캠핑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아빠의 부탁에 여행 중 기록해둔 영상들로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이는 엄마와 베니 삼촌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여행 중 새미가 보지 못했던 것은 카메라는 기록했다. 카메라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한다. 이내 이미지는 엄마와 베니 삼촌의 애틋한 불륜의 시선이 오가는 영화로서 편집되었다. 결국은 시선이다. 카메라와 이미지의 시선은 직관적 탐독을 통해 읽지 못하는 것을 읽게 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한다. 앞서 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몽타주는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컷은 유기적 충돌과 갈등해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며 이는 제3의 이미지로 나타난다고 얘기한 바 있다. 이처럼 새미의 카메라는 보지 못했던 것을 기록하여 그 이미지들로 편집하여 몽타주와 시선의 기능을 훌륭히 소화해 낸다. 또한 스필버그는 영화 <파벨만스>를 통해 창작자의 태도를 상기하는 대목을 비춘다. 주인공 새미는 베니와 엄마의 불륜 사실을 알고 엄마를 몇 주 동안이나 무시한다. 그리고 엄마에겐 불륜 사실을 편집하여 만든 영화를 보여준다. 그 사건을 계기로 엄마는 고통스러워한다. 가족에게 미안하면서도 베니를 그리워한다. 결국 엄마는 가족을 한데 모아 베니가 있는 피닉스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 즉 아빠와의 이혼을 선언한다. 이 장면에서 거울에 비친 울고 있는 가족들을 촬영하는 새미의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 새미는 촬영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새미의 환영만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스필버그라는 창작자의 태도를 상기한다. 새미처럼 창작자는, 즉 영화감독은 영화로서 얘기할 수 있고, 순간의 모든 것을 기록하며 이야기로서 극화해야 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 모든 것은 이야기고, 모든 것은 이미지다. 시선이 없다면 이야기는 없다. 이처럼 영화<파벨만스>에선 과거의 대목이 현재의 스필버그의 시선으로 극화되어 발현된다. 존경하는 감독 존 포드를 만난 새미의 엔딩 시퀀스는 압권이다. 얼굴에는 여자가 키스한듯한 립스틱 자국에 방에서는 담배만 뻑뻑 피어대는 대감독 존 포드는 새미에게 액자에 걸린 그림을 설명해 보라는 새미는 당황한 표정을 가지고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해 보지만 역시나 아니다. “지평선이 어디에 있지?”, “지평선이 바닥에 있으면 흥미롭고, 지평선이 꼭대기에 있으면 흥미롭고, 지평선이 가운데 있으면 더럽게 재미없어”, “이제 여기서 꺼져”방에서 나온 새미는 철로 된 계단 봉을 손으로 잡는다. 새미의 클로즈업된 뻔한 손은 카메라는 올라가 새미의 얼굴을 잡는다. 클리셰가 클래식이 되는 마법의 순간이다. 무언가를 다짐한듯한 새미는 힘차게 걸어간다. 아차, 지평선이 중앙에 있으니 카메라를 다시 한번 수정하면서. 이처럼 스필버그는 마지막까지 카메라를 통해 샘과 현재를, 그리고 관객을 객관화하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스필버그에게 모든 것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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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스필버그의 영화는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아울러 영화로 세상을 얘기하고 있다. <에이아이>(2003)에서는 미래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과 사랑, 그리고 존재 본질에 대한 것을 따뜻한 동화의 서사를 가져와 얘기하고 <뮌헨>(2006)에서는 역사 속 과오와 인간들의 이념과 전쟁에 대한 것을 이미지의 객관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반면 <파벨만스>(2023)에서는 창작자의 태도와 시선은 결국 영화라는 예술로서 발현될 수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예술이란, 결국엔 시선이다. 가장 개인적인 시선이 보편성을 가지고 결국엔 세상을 관통한다. 스필버그는 헐리웃의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작가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는 예술이자 산업이며, 산업이자 예술임을 철저히 인지하고 활용한다. 그리고 스필버그는 그런 많은 예산을 가진 산업적 시스템 속에서 자신만의 동화적 시선을 부여하는데 여지없이 과감하다. <에이아이>(2003)의 데이빗처럼 존재와 인간의 따뜻한 사랑의 힘을 믿고, <뮌헨>(2006)의 아브너처럼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편들지 않으며, <파벨만스>(2023)의 새미처럼 대담하고 영화를 사랑하며, 예술적 완연함을 위해 계속해서 도전한다. 우리는 어떻게든 스필버그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예전에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스필버그는 영화로서 존재하고 영화로서 얘기될 것이다. 존 포드의 가르침처럼 스필버그의 태도와 시선은 많은 영화인들에게 순수한 영화쓰기의 지평선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씨네21에 기고한 평론가 허문영의『하층민의 냉혹한 묵시록』(2005) 제목의 <우주전쟁>(2005)의 비평문 마지막 대목에 이런 말이 나온다. “스필버그는 전진한다” 참으로 통감하는 말이다. 결국 스필버그는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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