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교토, 파사드>하고 부르며
눈이 내려 쌓이던, 교토의 정경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때 나는 스물 한 살이었고, 친구와 함께 교토로 여행을 갔었다. 우리는 갑자기 쏟아지던 눈에, 잠바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아담한 목조 건물 앞에서 좋다며 사진을 찍곤 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리라 생각되는 고민들을 마음속 지옥처럼 품고서, 떠났던 여행이기에 아직까지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 같다.
어쩌면 ‘교토, 파사드’ 역시 그런 ‘나’의, 일종의 여행에 대한 기록이 아니었을까.
소설은 이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영화 「윤희에게」에서처럼, ‘나’는 ‘너’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는 듯하다. ‘나’와 ‘너’는 3학년 서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친해졌다. 가끔 ‘나’와 ‘너’는 진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고, 또 가끔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함께 웃기도 했다. 그런데 ‘너’는 졸업하자마자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갔던 행복의 기억을 따라 일본으로 떠났다. 그때만 해도 ‘나’는 ‘너’에게 한국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였으며, ‘너’의 좋은 친구였다. 그럼에도 ‘너’는 ‘나’를 위해 한 번도 한국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너’를 찾아다니는 것은 언제나 ‘나’의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의 시큰둥했다. ‘너’는 ‘나’가 평소 길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인지 알면서도 사십 분을 약속을 늦은 ‘나’를 비난했고, 한국에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나’를 ‘너’의 집에 최대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잘 알지 못했던 사람처럼. ‘너’는 단순히 바쁜 일정 속에 하루 오후를 내어 그 아름다운 바닷가의 절을 구경시켜준 것만으로, ‘나’에게 최선의 우정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러니까 ‘나’가 독한 알약들을 집어삼키고도, 남편을 잃은 ‘너’에게 찾아가지 않았던 것은 분명 더 이상 ‘나’의 아픔을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차피 다 끝나버린 관계이기에. ‘나’는 이제 ‘너’의 손을 놓아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너’는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나’의 곁을 맴돈다. 7월 하순, 우연히 보게 된 교토를 그린 책 두권을 바라보며, 그곳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너’를 떠올리고, ‘너’가 없는 교토에서 ‘너’를 찾았다. 항암치료 때문에 ‘너’의 시간이 멈춘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차마 물감으로 밀봉되지 못한 빛과 냄새를 떠올리며 ‘나’는 ‘나’가 생각하는 ‘너’의 파사드를 떠올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나’와 ‘너’가 서로의 파사드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는지.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한 적이 있었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나’와 ‘너’‘가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사연이 소설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나‘는 ’너‘와 만날 무렵 여러 달째 남모르게 불면증을 앓고 있었고, ’너‘ 역시, ’나‘가 모르는 ’너‘의 현실에서 어떠한 고통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런데 ’너‘와 ’나‘는 서로의 결핍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를 택한다. 아마도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는 ’나‘와 ’너‘가 각각의 파사드 속에 있더라도 분명 서로만큼은 자신의 고통을 혹은 상처를,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고 기대했기에 했던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자신의 파사드를 어찌 못하는 그들에게 있어, 또 다른 누군가의 파사드를 발견해주는 일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화자가 절대 ’너‘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편지를 보낸다고 가정하더라도 마지막 제로 챕터의 이야기들은 절대 못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소설은 이인칭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마지막 제로 챕터에서는 ’너‘는 단순히 너라는 이인칭 대명사가 아닌, ’민아‘라는 한 사람으로서 불린다. 또한 제로 챕터에서는 앞 챕터들과 달리 ’나‘와 ’너‘에 관련된 과거의 후회들이 아닌, 현재의 ’나‘의 후회가 담겨 있다. ’나‘가 결국 ’너‘의 손을 끝까지 잡지 못했다는 것. 또 여러 일을 겪으며 ’나‘가 더 강해졌다는 것. 즉, 이 챕터에서 ’나‘는 더 이상 ’나‘의 파사드 속에 숨지 않고 ’너‘에게 말을 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부분을 ’너‘에게 보내지 못할 거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너무 늦어버렸기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의 시간이 멈춰있는 상태에서 ’나‘의 시간이 움직일 언정 ’나‘는 끝까지 ’너‘의 파사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작가가 마지막 챕터를 제로 라고 붙인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파사드가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 낡고, 부서지고 녹슬어 언젠가는 파사드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올지라도. ’나‘의 속에서 바라본 ’너‘의 파사드는 여전히 교토에서 만났던 그 시간에 멈춰있는 채로, 굳게 문을 잠가놓은 채로 있기에. 제로라는 타이틀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영원히 멈춰버린 ’나‘가 바라본 ’너‘의 파사드 속 시간을 표현한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외에도 소설은 다양한 형식을 활용해 화자의 심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었던 형식은 그림이라는 방식을 활용한 부분이었다. 단순한 스케치로 그려진 사람들이나 폐쇄적으로 보이는 파사드들의 그림을 활용했던 점은 ’나‘가 ’너‘에게 느꼈던 순간의 감정들이나 또한 굳게 닫혀 있던 ’나‘와 ’너‘의 심리를 적절하게 그림을 잘 배치하여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전개되는 소설의 방식 역시 독자의 몰입도를 높여주기에 좋은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떨 때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또 어떨 때는 시처럼, 또 어떨 때는 소설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글의 형식은 작가가 소설가이자 시인인 만큼 작가 특유의 독특한 방식을 엿볼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또한 이 글을 쓰게 된 작가의 동기 역시 나에게는 독특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김중일 작가의 교토 일러스트를 보게 된 점 그리고 이러한 글을 작가가 소설의 형식 카테고리에 넣었다는 부분 등 한강 작가가 작가로서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방식이 소설의 끝에 적혀져 있어 더욱 소설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스스로가 편견에 많이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글만이 소설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해진 편견을 작가가 깨부수는 듯한 느낌이 들어 통쾌한 소설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또한 소설이라는 예술의 한 장르가 단순히 문학 카테고리 속 소설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일러스트와 같은 다른 예술 분야와 합쳐저 또 다른 예술 분야의 카테고리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도 예술의 방식이 점점 더 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한강작가와 같은 예술가들이 남들이 해보지 않았던 방식이나 형식을 발견하고, 찾아내 이러한 새로운 예술의 방식이 계속해서 탄생시킨다면, 소설을 포함한 다른 예술 장르 역시 현재의 침체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