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드러나는 나와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나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차이는 매우 모호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따라 나타나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친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오픈하는 편이고 그렇지 않으면 웬만해선 다가가지도 못하는 편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나의 성격이 내성적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나는 이러한 성격 덕분에 어렸을 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첫걸음, 그러니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을 어려워했기 때문에 자꾸만 드러나는 나와 드러나지 않는 나의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 같다. 때로는 밝게 지내는 나와 어둡게 지내는 나가 하루가 각각 나타날 때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초반에는 무슨 성격이 나의 성격이고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글쓰기였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생각들을 펼쳐낼 수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서사적인 글쓰기에 끌렸었는데 그 이유는 설명문이나 논설문이 아닌, 이야기 속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형식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논설문이나 설명문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서사를 통해 움직이는 인물들의 행위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처음 창작을 시작했을 때는 아마도 나는 이런 것들을 글로써 실현시켜서 내 생각들을 보고 싶어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첫 창작은 완전히 실패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나 나름대로 좋아했었던 것 같다. 단지 내 생각을 온전히 펼칠 수 있다는 것에 말이다.
내가 지금까지 창작을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글 속에서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인물이 진짜 알고 있는 ‘나’라는 존재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 있는 인물과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물론 그 안에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갈등이 존재하고 때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침묵을 지킨다든가 방관하는 일도 있다. 두 명의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분리할 수도 합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가끔씩‘한쪽의 나’에게 휘둘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굳이 이 두 존재에 대해서 협력이나 공조 같은 것은 딱히 바라지 않는다. 어쨌든 이 두 존재도 ‘나’의 일부분인 것들에 속하니까. 굳이 이 두 존재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될 수 있으면 그냥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다. 그 이유는 그들이 충돌하는 것으로 인해 나는 계속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그 나름대로 목표를 찾게 되기 때문에. 나는 이 사이클을 잃어버리는 것이 싫다. 그 둘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자잘한 목표들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