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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30. 2024

자본의 욕망전차가 아직 이르지 않은 곳

산티아고순례길 30일차

   오월의 햇빛입니다. 칠월의 초록이에요. 구월의 그늘입니다. 십일월의 바람이에요. 이 고장의 오월을 우리가 알고 있는 오월이라 부르면 안 될 것 같아요. 햇빛만 오월입니다. 초록, 그늘, 바람, 다 다른 계절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 고장의 오월을 나는 봄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아, 이곳의 오월이 원래 이랬던 건 아니랍니다. 사람들의 욕망이 초래한 고장 난 지구, 그래서랍니다. 당신이 있는 곳에 이상고온이 지금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이상저온이 계속되는 거랍니다. 지구가 뒤죽박죽입니다. 질서가 없어졌습니다. 지구 위에 아직 질서가 유지되는 곳이 어느 한쪽에 몰래 남아있기나 할까요? 태초에 신이 심어놓은 질서가. 자본의 욕망전차가 그냥 지나쳐갔거나 아직 이르지 않은 곳.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 깃들 수 있을까요.

   오늘도 많이, 41km를 걸었습니다. 다섯 시, 아직 깜깜한 새벽에 나섰습니다. 까미노를 걸으며 가장 일찍 나선 날입니다. 추워서 추리닝 바지를 숄처럼 두르고 바람막이를 입었어요. 주어진 것을 선용하라, 까미노에서 참 많이 생각하는 희랍의 속담.


   불빛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어둠이었고 머리 위, 눈앞에  별들이 깨끗한 알몸을 내보이며 반짝였어요. 투자수익률과 손익계산서에 의해 아직 해체되지 않은 별들이. 나는 신에게 참배하러 가는 진짜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 맑고도 엄숙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까미노에서 몇이나 될까요. 당신에게,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별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검초록 숲의 냇물로 씻어낸 듯한 깨끗한 별빛들. 내일 지구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밤하늘에 별만 반짝인다면 우리는 안락한 잠 속에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걸은 길도 좋았습니다. 어떤 길은 제주의 원시림과 비슷하기도 했고 어떤 길은 호젓한 시골길이었습니다. 오후도 않았습니다. 십일월의 바람이니까요. 전에 만났던, 한전에서 퇴직한 부부를 다시 만나 콜라를 얻어마셨습니다. 다음에 본다면 제가 커피를 사야겠어요.

   

   손을 잡고 걷는 부부순례자를 보았습니다. 손을 잡고 부부가, 피레네산맥을 넘고 메세나평원을 지나, 가파른 갈리시아 산들을 넘어왔을 거예요.... 당신과 나도 가파른 산을 넘은 적이 있었죠. 미안합니다. 당신이 평원만 걷도록 하지 못해서.




   이틀만 걸으면 다 왔습니다. 산티아고, 내가 산티아고에 가는 이유를 다 알았습니다. 산티아고가 왜 나를 불렀는지.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이것도 산티아고가 내게 주는 선물이에요.


   잘 걷겠습니다. 당신도 오후를 잘 걸으시고 편안한 저녁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 당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하루에게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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