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진정한 캣파더.
신혼시절, 그분과 함께 아파트 단지를 거닐고 있었다. 작고 앙상한 나무에 무언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너무도 작은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바들거리고 있었다. 혼자 어떻게 그곳에 올라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구해달라는 듯 빽빽 울어대는 그 녀석을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분 어깨 위로 올라탄 새끼고양이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그분이 고양이 아빠가 되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털 알레르기가 심하다는 것. 작지만 맑고 깨끗했던 그분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됐고, 콧물은 줄줄 흘렀으며, 연거푸 나오는 재채기로 하루하루 숨 쉬기 조차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분과 새끼고양이의 동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새끼고양이에게 새로운 집사를 찾아 주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올렸고 우리는 작고 소중한 존재와 이별했다.
시골주택이었던 우리 집엔 쥐가 많이 보였다. 쥐들과의 동거가 여간 소름 끼치는 게 아니었다. 엄마가 우리 집에 올 때면 낯설고 불쾌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투정처럼 내뱉었다. 어느 날 엄마는 낯선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다.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인연이란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려준 엄지. 새침함과 우아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고양이계의 오드리 헵번이었다. 첫 만남에서 엄지는 이미 만삭이었다. 일주일 만에 새끼 3마리를 낳았고 새끼들 중 끝까지 남은 건 1마리(엄지 아들 모찌)뿐이었다.
어찌나 영리한지 동네 마실 나갔다가도 이름을 부르면 귀신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녀석(엄지, 모찌)들이었다. 마당보다 안전하게 집안에서 키우고 싶었지만 그분의 알레르기 증상을 알고 있던 난 고집부릴 수 없었다.
마당에는 엄지와 모찌를 위해 늘 밥그릇을 놓아두었다. 동네 고양이들 사이에선 사료 맛 집으로 소문이 났는지 마당을 오가는 녀석들이 많았다. 그분이 해외 출장 중인 어느 날 꼬박꼬박 밥 먹으러 오던 길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 마당으로 나가 불러보았다.
“꼬미야. 꼬미야. 꼬미야!”
“야옹. 야옹. 야옹.”
마치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는 듯 저 멀리서 대답하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논 너머 논두렁 어딘가에 불빛 두 개가 동동 떠 있었다. 정확한 소리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불러 보았다. 밤공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우렁찬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야옹야옹’ 소리는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보는 빛이 눈동자 두 개가 확실해 보였지만 움직임은 없었다. ‘부르면 대답은 하면서 왜 밥 먹으러 오지 않지?’ 하는 생각에 랜턴을 비추고 꼬미를 부르며 이동해 보았다. 부르는 족족 대답을 하며 반짝이는 불빛 두 개가 내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에, 중간지점에서 마주친 존재는 새까만 아기고양이. 가로등 불빛 아래 더없이 앙증맞은 녀석은 야무지게 울고 있었다.
“너였어? 열심히 대답한 게 정말 너였어?”
“야옹.”
착실하게 대답하며 나를 만나러 와준 것이 이 조그만 털뭉치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나를 키워 당장! 나를 데려가.’라는 듯 당돌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대로 간택당했다.
그분이 출장에서 돌아왔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우쭈와 마주한 그분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우쭈의 범상치 않은 새까만 외모를 보고 길고양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난 선수 치며 말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올 블랙 고양이가 봄베이 품종이더라. 누가 유기했나 봐.”
이미 집안에 들인 아이를 내쫓을 수 없지 않으냐며 강력하게 종알댔다. 우쭈의 강렬한 간택 눈빛에 넘어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집에 들이긴 했지만 내심 그분이 털 알레르기로 힘들어하면 어쩌나 걱정됐다. 어쩐 일인지 그분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무수히 많은 날이 지나도 괜찮았다. 브라보!
난 우쭈와 엄지, 모찌, 그 밖에 우리 집에 오는 모든 고양이를 각별하게 대했다. 그분은 그런 점을 못마땅해했다. 서열이 바뀌었단다. 그분은 내가 고양이 챙기는 걸 우선시한다고 생각했다. 괜스레 고양이 털 때문에 코가 간지럽다고 콧바람을 뿜어대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분이 외치는 한마디.
“내보내.”
“집안에서 잘 살고 있는 애를 왜 자꾸 내보내라고 그래? 가족을 버려?”
“버리는 게 아니라 동물은 원래 밖에서 생활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지. 우쭈가 나가고 싶을 수도 있고 쟤는 밖이 더 행복할 수 있어.”
우쭈가 밖에서 더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구차스러운 변명으로 들렸다. 그분이 내보내라는 말을 할 때마다 매정한 사람으로 생각됐다. 나는 언제나 고양이 대변인이 되어 얘기했다.
우쭈는 창틀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탈출한 우쭈를 잡아오느라 애먹은 적도 여러 차례. 마당을 동경하듯 바라보는 우쭈 뒷모습은 그분이 했던 말이 어쩌면 궤변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우쭈와 처음 만난 날 나에게 보낸 눈빛이 데려가 달라는 게 아니었을까?
출근하려다 마당 고양이 엄지와 인사를 나눴다. 그날따라 엄지 앞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보니 다리 안쪽 피부가 전부 벗겨져 있었다. 내 주특기인 호들갑이 시작됐다. 한바탕 소란을 떨며 그분을 흔들어댔다.
“언제부터 저런 거야? 이렇게 될 동안 못 봤어!? 피부가 이렇게 많이 벗겨졌는데 몰랐다고?”
“괜찮을 거야. 빨리 출근해. 늦겠다.”
애 잘 보지 않고 뭐 했냐며 그분을 추궁하고 질책하는 꼴이었다. 그분은 내 원망 섞인 질문세례에도 잘 참고 있었다. 출근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랜 마당 냥이 생활로 엄지 몸 상태가 점점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분에게 무리한 부탁이란 걸 알고 있지만 엄지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병원 안 가도 나을 것 같다는 답장을 보낸 그분에게 나의 메시지는 이랬다.
“난 엄지 잘 못되면 진짜 못살아. 엄지 저대로 밖에 안 둘 거야. 병원 데려가서 치료하고 집안에서 키울 거야!”
엄지를 집안에 들였지만 이번에도 그분의 털 알레르기 증상은 잠잠했다. 우쭈는 그렇지 못했다. 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했고 서로를 향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두 마리 고양이가 싸우는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그분은 말했다.
“우쭈야, 엄지야, 아빠가 문 열어 줄게. 너네 나가고 싶지?”
하루에도 몇 번씩 내보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말과 다르게 투박한 손으로 엄지 다리에 연고를 발라 주고 물과 사료를 정성껏 챙겨 준다. 그분은 밖에 있는 고양이들도 살뜰히 먹인다. 고양이들과 있을 때 행복해하는 나를 배려해 주는 당신은 진정한 캣파더.
모찌까지 들여오면 난리 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