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작가는 '여행의 이유' 산문집에서 처음 만났다. 경쾌하고 산뜻했던 첫 만남으로 기억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소설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첫인상은 밝았지만 다음 만남은 깊고 어두웠으며 아팠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소설로 풀어냈다. 가장 아픈 이야기를 글로 새긴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버텨냈을까. 차마 눈뜨고 마주하기 어려웠다. 버려진 아이들의 처참한 생활에 몇 번이나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따뜻한 울타리에서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아이들이 지옥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세상 밑바닥에서, 범죄와 타락 속에서 이미 영혼마저 죽은 아이들.
주인공 제이는 두 번의 버림으로 뿌리마저 상처가 된 소년이다. 현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제이는 영적인 세계로 스스로 밀어 넣는다. 사물, 인간의 감정과 고통에 과몰입하다 급기야 과공감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어쩌면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꽉 막힌 현실 궤도를 벗어나 영적인 무한궤도를 향해 질주한다. 방향도 목적지도 없는 아슬아슬한 질주는 어디로 향한 걸까. 끝인 줄 알면서 멈출 수 없었던 마지막 질주 그 블랙홀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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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기억은 외려 생생해지기만 하는데, 새로운 경험은 그에 터무니없이 미달한다는 것을 거듭하여 깨닫게 될 때, 인생은 시시해진다. 나는 너무 일찍 그걸 알아버렸다. ---32p
가끔 제이가 바보처럼 엉뚱한 예측을 계속하면 내 쪽에서 의지를 접거나 내가 원했던 것을 제이가 원하는 쪽으로 바꿔치워 버렸다. 그랬다. 자신을 속인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제이가 알아차려준다는 것의 달콤함에 취해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거. 나는 고개를 끄덕여 제이가 원하는 것을 그냥 내가 원했던 것인 양 믿어버리곤 했다. 제이는 내 욕망의 수신자가 아니라 통역자였다. ---37p
혹시 그때의 제이는 악마를 잡으려던 것이 아니라 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이미 영혼의 일부 혹은 전부를 그 세계로 던져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 그의 행적을 돌이켜 짚어보면, 두 개의 거울 사이에 버티고 선 순간 제이는 두 번이나 자신을 버린 세상의 규칙과 궤도로부터 벗어나 일종의 무한궤도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다. ---58p
슬픔에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러니까 서러움에 가까운 감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음이 차가워지는, 비애에 가까운 심사도 있다. 그날의 나는 후자였다. 머리에 서리가 낀다고나 할까. 심장이 차갑게 식으면서 눈가가 시렸다. 그들은 그다음 역에서 일제히 내렸다. 수어를 하는 아이들의 손에서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61p
함구증의 시절에 제이는 내 욕망의 통역자였다. 이제 그는 고통을 읽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쉽게 읽고 던져버릴 수 있는 대중소설이 되고 싶지 않았다. ---138p
제이는 바다의 기이함을 단숨에 파악했다. 바다, 그것은 거대한 없음이었다. 제이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존재하지 않게 될 미래를 떠올렸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의 시간이 바다라는 형태를 빌려 나타난 것만 같았다. ---167p
굵은 붓으로 단숨에 그어내리다가 도 때로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호를 그리며 부드럽게 돌아나갔다. 뜻을 모르는 글자들은 그림처럼 보였고 강사의 붓놀림은 춤과 같았다. ---173p
누가 그랬던가. 인간의 인생이란 고작해야 과거에 읽은 어떤 소설보다 조금 더 잘 기억나는 한 권의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251p
제이는 오후 늦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온 집안에 무거운 잠의 기운이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279p
책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영화 한 편을 보듯 엄청난 흡입력과 속도감으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작가가 겪은 일이 아닐까 싶을 만큼 문장 하나하나가섬세했다. 쓰는 사람이 글 밖에 있지 않고 글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라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세밀하고 촘촘한 전개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서사 중간에 방지턱이 없었다.단한 번도 덜컹거리지 않고 멈추지 않으며 유유히 흘러갔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무한 질주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막이 내리고서야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다.소설이 가진 매력에 흠뻑 빠지기 좋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