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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더렌즈 Jun 07. 2024

'가난을 팝니다' 독후감: 그라민뱅크의 배신

여성의 경제적 역량 강화 프로그램 진행 시 유의사항

빈곤층 여성의 경제적 역량 강화에 기여하는 방안으로 ‘마이크로파이낸스’가 한때 주목받았던 적이 있습니다.마이크로파이낸스는 사회적 취약 계층에게 소액대출 등을 제공해 경제적 활동을 돕는 사업입니다. 경제적 소득원과 자본이 부족한 여성들에게 경제적 활동을 시작하고 확장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되었지요.


마이크로파이낸스는 당시 인구의 36퍼센트가 유엔의 생계수준 하루 2달러 이하로 삶을 이어가는 방글라데시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마이크로파이낸스가 “이전의 발전 모델이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이룰 것을 약속”하고 “인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할 것이라고 평가 받으며, 유엔은 2005년을 국제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해로 제정했고, 마이크로파이낸스 모델을 도입한 ‘그라민 은행’과 설립자 유누스 교수는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태생의 인류학 교수 라미아 카림은 2011년 ‘가난을 팝니다: 가난한 여성들을 착취하는 착한 자본주의의 맨얼굴(Microfinance and Its Discontents: Women in Debt in Bangladesh)’ 책을 통해 마이크로파이낸스 프로그램을 전면 비판하고 나섭니다. 서구의 비정부기구(NGO)가 신자유주의적 관점으로 현지 문화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여성들의 삶을 오히려 악화했다고 보고한 것인데요. 

해당 책은 국제개발협력 프로그램 매니저에게도 크나큰 울림을 주는 책입니다. 타국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프로그램 참여자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는 지점들을 실제 사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데요.책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특히나 젠더적 관점에서 번호로 정리해보았습니다.


1. 여성을 채무자가 아닌 사용자로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가 언급하듯, 그라민 은행을 위시한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들은 빈곤 근절 및 여성 역량 강화를 달성하는 핵심 수단으로서 서구 발전기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마이크로파이낸스를 둘러싼 주요 담론들이 대출자와 사용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대출자가 되는 것이 여성의 삶에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미치는지 분석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마이크로파이낸스의 선두주자인 그라민 은행은 시티은행그룹에 비견될 만한 98퍼센트에 달하는 경이로운 대출금 회수율을 거두어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98퍼센트라는 높은 회수율 만으로는 대출금이 자발적으로 상환(repayment)이 된 것인지, 강압적으로 회수(recovery)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음을 지적하며,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들이 대출금을 되찾을 때 그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대출을 갚지 못하는 경우 실제 경찰에 이송되거나 법정에 서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1997년에는 대출금을 연체한 여성 세 명이 지역 경찰서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당시 연체된 금액은 2400따까(52달러)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또한 저자는 마이크로파이낸스 NGO들이 농촌 여성의 ‘명예’와 ‘수치’를 대출금 회수에 이용한다고 폭로합니다. 공개적 망신 주기를 대출금 회수 전략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인데요.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고발당한 여성들은 공적 장소에 출두해 명예를 잃을 뿐 아니라, 법정에 ‘범죄자’로 출두해 가족과 남편에게도 ‘불명예’를 안겨주며 시집 식구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쫓겨나는 등 고초를 겪게 됩니다. 


책에 나온 다음 인용구는 대출금과 관련해 여성들이 겪는 고초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대출금을 받자마자 걱정이 시작됐다. 어떻게 빚을 갚을 것인가? 매일매일이 스트레스였다. … 상환금을 연체하면 그룹 회원들이 찾아와서 괴롭힌다. NGO 활동가가 와서 또 괴롭히고 모욕을 준다. 남편과 시집 식구들이 화를 낸다. 남편은 “당신 때문에 우리가 이짯(명예)를 잃었다”고 한다. 우리는 사방에서 압박을 받는다.” (p. 163-164)


2. 여성이 경험하는 가족 간 역학      관계를 유의해야

책에 소개된 다양한 사례들과 여성 대출자들과의 대화에 따르면, 마이크로파이낸스는 여성의 역량을 강화하고 공동체 및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성의 지위를 취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선 여성이 대출을 받아도 자금을 사용하는 것은 권력 관계상 우위에 있는 남편이나 남자 친족일 수 있습니다. 실제 책에 나온 많은 증언들이 “그라민은행을 비롯한 NGO 대출자들과 이야기해보면 실상은 공식적 대출자만 여성일 뿐 그 돈을 쓰는 사람은 남편”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여성들이 고립된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마을의 확대 가족 안에서 친족관계로 연결된 주체이기 때문인데요.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대출을 받는 주체로서 여성은 이제 두 가지 형태의 권위-남편/가족과 NGO/대출자 그룹-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대출금을 제때 갚지 못하면 친족 집단과 공동체에서 신뢰를 깨뜨리는 일이 된다.” (p. 93)


정리하면 여성들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남편이 대출금을 통제하는 가부장적 가족 안에 놓이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남성 관리자가 다른 그룹의 여성 회원들에게 연체자를 찾아가 돈을 상환하라고 시키는 NGO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성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이크로파이낸스 NGO들의 활동을 통해 여성들의 공적 공간에서의 가시성이 늘어난 것은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족 관계의 역학에 대한 고려 없는 개입은 도리어 여성들의 취약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3. 경제적 역량 강화가 질적으로      이뤄져야

이 외에도 저자는 마이크로파이낸스 NGO들의 활동이 여성들의 경제적 역량 강화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대출금 대부분은 생산 활동에 투자되지 않고 개인 소비에 쓰인다” “새로 받은 대출금은 이전에 받은 빚을 갚는 데 쓰인다”는 증언을 모은 것인데요.


돈을 제때 갚지 못한 여성들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망신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그간 모아둔 자산을 파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타 기관에서 다시금 대출을 받는 등 악순환에 놓이기도 합니다. 여성들이 마이크로파이낸스에 깊이 관여하면서 오히려 여가와 교육, 복리후생이 축소되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 것입니다. 


4. 여성의 권한을 충분히 알려야

그라민은행은 가난한 여성들을 주주로 내세워 찬사를 받았는데요. 그런데 현지조사 중 그라민은행이 1983년에서 1999년 사이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저자가 만난 그라민은행 회원 누구도 주주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고 배당금을 요구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5. 실제 빈곤층을 타깃해야

다양한 NGO 주체들의 등장과 더불어 체불 위험이 적은 대출자를 늘리기 위해 농촌지역 상인과 중산층에게 대출금을 주는 경우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부유한 여성이 가난한 여성을 대리 회원으로 고용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여성들은 가능한 많은 NGO에 가입해 중복 대출을 받으며 직업적인 대리 대출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마이크로크레디트로 사업을 시작하는 등 긍정적 사례로 알려진 여성은 실제 알고 보니, 남편이 군대에서 매달 급료를 받는 농촌 중산층이었습니다. 여성이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떤 배경은 남편의 수입 덕분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저자는 다양한 인터뷰와 사례 연구를 통해 마이크로파이낸스가 실제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6. 현지 문화권 지도자와 함께해야

원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NGO와 이슬람 문화권과 대립이 여성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이슬람 지도자는 빈곤층의 표를 얻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빈곤층을 지원하는 NGO와의 권력 경쟁이 일어납니다.


실제 NGO가 주최하는 행사나 집회 등이 이슬람 문화권의 기조와 맞지 않아 이슬람 지도자들이 격대노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NGO 사무실을 목표삼아 BRAC, 그라민은행, 쁘로쉬까 등의 NGO 사무실을 약탈했습니다. 책에서 한 지역 사업가는 이슬람 지도자의 격노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외국에서 돈을 받는 일부 NGO들은 자기들이 하루아침에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지역 권력 구조를 무시해요.”


이때 이슬람 지도자들이 여성 집회 참여자들에게 “너희는 비도덕적인 여자다.부끄러움도 모른다. 벌거벗고 있는 것과 뭐가 다르냐”라면서 청년들에게 여성들의 옷을 벗기게 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집회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했고 자발적인 주체도 아니었던 가난한 농촌 여성들이 이 사건의 진정한 피해자”였다고 꼬집었습니다.



실제 국제개발협력 프로그램 진행시에 책에서 언급된 실례들을 유의하여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현지 여성들을 돕는다는 선의가, 오히려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본 활동은 KOICA가 지원하고 아시아위민브릿지 두런두런이 수행하는 ‘개발협력 젠더 부문 정책-사업 통합적 역량강화’의 일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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