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림, 《안동림의 불멸의 지휘자》
B26. 거장의 시대를 수놓은 지휘자들의 이야기 / 《안동림의 불멸의 지휘자》 - 안동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누가 저한테 “당신은 실내악과 관현악, 둘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십니까?”라고 물어온다면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당신은 실내악과 관현악 둘 가운데 어느 쪽을 싫어하십니까?”라고 물어온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할 것입니다. “싫어하다니요? 당연히 둘 다 좋아하지요!”라고요.
그래도 아주 엄밀하고 집요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실내악보다는 관현악을 더 좋아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향곡을 포함하여 관현악은 결국 지휘자들의 음악입니다.
예, 지휘자입니다. 아니, 지휘자들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레너드 번스타인이 세상을 떠난 뒤로 사실상 ‘거장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적어도 저한테는 그렇습니다.
또, 예전에는 명지휘자나 명실상부한 거장들에게만 붙였던 ‘마에스트로(Maestro)’라는 명칭이 지금은 ‘지휘자(Conductor)’라는 명칭보다 일반적으로 더 널리 쓰이는 느낌입니다. 굳이 구분해야 하나 싶기는 한데, 여성 지휘자의 경우에는 ‘마에스트라(Maestra)’라고 하지요.
이 책은 바로 그 거장들, 마에스트로들의 시대에 활약했던 명지휘자들 34명에 관한 이야기를 차례로 들려줍니다. 1867년 생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부터 시작하여 1946년 생인 주제뻬 시노폴리까지 순서대로 나아가지요. 물론 이는 저자의 선택입니다. 또, 이 책의 발간 연도가 2009년이기도 하여 사이먼 래틀, 키릴 페트렌코, 정명훈, 오자와 세이지, 마리스 얀손스, 구스타보 두다멜, 클라우스 메켈레 등등은 없지요.
그래도 이 34명 가운데는 제가 좋아하는 지휘자들이 거의 빠짐없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처럼 교향곡을 포함하여 관현악을 좋아하고, 지휘자들한테 관심이 많고, 진심으로 애정하는 지휘자가 있는 독자라면 이 책,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 전체가 5백 쪽 가까이 되지만, 지휘자 한 명당 할애된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 또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처럼 34개의 챕터 각각의 소제목에서 지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저자가 붙인 짤막한 논평 성격의 글이 지휘자의 특성 또는 성격을 촌철살인의 적확함으로 표현해 보여줍니다.(지휘자 이름 표기는 책을 따랐습니다.)
엄격하고 건강한 절제의 힘 - 토스카니니.
낭만적인 독재자 - 빌렘 멩겔베르크.
거침없이 유영하는 정밀한 지휘봉 - 삐에르 몽뙤.
행복을 그리는 따뜻한 지휘자 - 브루노 발터.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부 - 툴리오 세라핀.
음악계의 위대한 괴짜 신사 - 토머스 비챰.
전통의 감성을 잃지 않는 지휘자 - 카알 슈리히트.
춤사위를 이끄는 리듬의 신 -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지휘대의 불사조 - 오토 클렘페러.
시대를 초월해 타오르는 혼불 - 빌헬름 후르트벵글러.
고귀함과 천박함을 아울러 갖춘 야인 - 한스 크나퍼츠부슈.
긴장감 넘치는 엄격한 장인 - 후리츠 라이너.
오르간 음향에 심취한 소리의 마술사 - 레오폴드 스토코프스기.
약동하고 노래하는 생명의 지휘 - 에리히 클라이버.
독일적 구성력, 불란서적 감성의 거장 - 샤를르 뮌슈.
흔들림 없는 떡갈나무 같은 음악 - 카알 뵘.
장식을 버리고 음악만으로 승부하다 - 죠지 셀.
무개성의 개성 - 유진 오먼디.
그윽하고 인간적인 선율의 따스함 - 죤 바비롤리.
당당하고 건전한 독일적 낭만 - 오이겐 요훔.
우리 시대의 마지막 독재 지휘자 - 에프게니 므라빈스키.
그의 음악은 흐르지만 행진은 하지 않는다 - 앙드레 끌뤼탕스.
부드럽고 폭넓은 오케스트라 트레이너 - 안탈 도라티.
20세기의 마지막 완벽주의자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타협을 거부한 이단적 독설가 -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담금질 - 게오르그 숄티.
예리한 시선, 예민한 본능 - 키릴 콘드라신.
유연한 배려, 고상한 품격 –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
본질에 충실한 깊고 큰 음악 – 라화엘 쿠벨리크.
바로크와 고전의 지적인 해석자 – 카알 뮌힝거.
음악의 피터팬, 지휘대의 르네상스맨 – 레너드 번스타인.
바흐 음악의 영혼을 꿰뚫다 – 카알 리히터.
황홀한 도취경, 타고난 명지휘자 – 카를로스 클라이버.
오페라와 인간, 그 치열한 내면의 탐구 – 쥬제뻬 시노폴리.
본문의 독서는 이 지휘자들에 대한 짤막한 설명의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의 장한나나 진솔 등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수많은 여성 지휘자가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시대적인 한계도 있고 해서인지, 전부 남성 지휘자들뿐이라는 점이 아쉽기는 합니다.
맨 앞의 ‘지휘봉이 그리는 음악예술의 세계’ 편은 지휘자의 역사에 대한 짤막하고도 일목요연한 설명입니다. 여기서는 오늘날처럼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고 지휘를 한 것은 19세기 초에 들어서였으며, 지휘자가 하나의 뚜렷한 직업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한스 폰 뵐로우부터였고, ‘낭만적인 주관적 지휘법’과 ‘이지적으로 분석하는 객관적 지휘법’이라는 두 개의 지휘법이 뚜렷하게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경향이라는 것까지, 지휘라는 것 자체의 역사를 개관할 수 있습니다.
저한테는 좋아하는 지휘자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던, 그리고 그들의 몰랐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즐거운 독서 체험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