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나는 클라스〉 김경훈 기자 편 영상
C06. 알리는(알려지는) 것이냐, 소비하는(소비되는) 것이냐 – 〈차이나는 클라스〉 김경훈 기자 편 영상
우리가 저널리즘에 기대하는 것
우리가 저널리즘에 기대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이 사회에서, 또는 이 세상에서 뭔가 고치거나 바로잡아야 할 문제들을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서 환기하는 역할일 것입니다.
또는, 잊기 쉬운 문제들을 잊지 않도록 되새겨주고 경고하는 역할이겠지요.
지금까지 저널리즘은 이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때로는 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취재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분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상에서 김경훈 기자님이 소개하신 몇 장의 퓰리처상 수상 사진들도 바로 그런 역할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포토 저널리즘만이 수행할 수 있는 고유의 방식으로 해냈던 사진들일 것입니다.
알린(려진)다는 것의 함정
하지만 ‘널리 알린다(또는 알려진다)’라는 것에는 함정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은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이라는 전통적인 매체들을 포함하여 인터넷 기반의 수많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비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그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의 수효로 흥행 여부를 판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명 ‘천만 영화’들의 경우, 우리나라 인구 5천만 명 가운데서 무려 5분의 1에 해당하는 천만 명이나 그 영화를 관람했으니, 그 영화가 전달하려는 어떤 메시지가 그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통하여 실제로 사회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은 그렇게 무리한 기대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를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들 머릿속에 하나의 지식이나 인식으로 자리 잡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사회적인 실천으로 연결되어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또는 쉽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예술작품이냐, 소비재냐
이는 그것이 예술작품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일종의 소비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품경제에서 소비된다는 것은 곧 잊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잊히지 않으면 재생산과 재소비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습니다. 빨리 소비되고 빨리 잊혀야 그다음의 또 다른 소비 행위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경제가 돌아가니까요.
이는 포토 저널리즘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원리가 아닐까요.
오히려 포토 저널리즘은 우리한테 영화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심지어 무료로, 그것도 날마다, 거의 초 단위로, 무차별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더더욱 ‘소비되고 곧 잊힐’ 위험성에 많이 노출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마 퓰리처상 같은 상을 제정해서 특정한 사진에 상을 수여하여 기리는 것도 그렇게 소비되고 잊힐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하면 어쨌거나 다시 한번 그 사진이 담고 있는 이슈가 환기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 다시 한번의 환기조차도 소비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헌신과 변화의 현실화
실제로 우리는 날마다 그런 것들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는, 날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줄기차게 ‘소비’ 또는 ‘소비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빨리 잊지 않으면 그 축적의 스트레스로 편안히 숨 쉬고 살아가기조차 버겁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숙명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실제로 변화를 구현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에 대한 한 가지 답을 브라질의 사진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가 자신의 TED 영상 마지막에서 보여준 사진, 황무지를 울창한 숲으로 만든 바로 그 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그 사진을 찍어서 무언가를 알리려고 했던 사진가 자신이 그 사진이 지향하는 어떤 변화를 위한 일에 계속 헌신했을 경우, 그 변화가 마침내 현실화될 수 있지 않나, 하는 일종의 희망 섞인 기대와 관측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비자이자 생산자
알리는 것과 소비하는 것 사이, 알려지는 것과 소비되는 것 사이에서 ‘변화’가 실종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시 의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저널리즘 종사자들도 그것이 직업인 이상 언제까지나 그 한 가지 이슈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줄기차게 또 다른 현장으로 취재를 떠나야 할 텐데, 그 또한 일종의 소비요 소비 행위입니다. 취재라는 모양새의 소비인 셈이지요.
그리고 소비인 이상 그것도 곧 잊힙니다. 많이 소비되고 많이 잊힐수록 기자라는 직업으로는 더욱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참 아이러니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포토 저널리즘의 특징이자 한계겠지요.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은 우리 모두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이기도 한 시대입니다.
스마트폰 하나만 손에 쥐고 있으면 누구나 소비를 하는 동시에 뭔가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 시대가 앞으로 더욱 성숙해지면 ‘변화’를 위한 어떤 중요한 ‘변화’가 이 세상에서 정말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은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기대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