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서둘러 산에 갔다돌아와 보니 점심도 훨씬 전이었다. 운이 좋아 제법 많은 나물과 약초를 캘 수 있어 기분이 아주 좋았다. 요즘 같은 4, 5월 봄에는 산과 들로 냉이, 쑥, 참나물, 곰취, 고들빼기, 명이와 같은 나물들이 쑥쑥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 양념 없이 된장만 넣고 무쳐도 쌉싸름하면서도 달 큰 짭조름한 나물의 맛과 향이 식욕을 돋우었다. 쌀은 고사하고 보리쌀 마저 귀한 집에 그나마 고픈 배를 채워주는 귀한 양식이었다.
동생들이 집에 돌아와 허기로 기운이 빠진 채로 마루에 누워있었다. 녀석들이 아버지 때문에 기분이 상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평소답지 않게 야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나무를 했다. 깡마른 몸체보다 두 세배는 거뜬히 넘긴 커다란 나무 짐을 지고 용케 산아래로 내려가는 동생들이 대견하고 기특했다. 나는 배고픈 동생들을 위해 얼른 먹을 것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안방을 기웃대며 아버지의 동태를 살폈다. 아버지는 여전히 세상 시름 다 끌어안은 사람처럼 유난히 깡마른 등허리를 보이며 벽을 향해 누워 있었다. 아침에 어머니가 들인 밥상이 역시 그대로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꼼짝 않고 누운 아버지의 여윈 어깨가 들숨에 올라왔다 날숨 한 번에 푹 꺼졌다.
- 아부지, 이케 조반도 안 자시믄 참말로큰일 나여. 고 제비 녀석, 상처가 꽤 많이 나았은께, 요것이다인품이 훌륭하신 아부지 은덕이 하늘같이 높고 바다처럼 크고 넓어서가 아니겠어여! 그니께너무 상심해하지 마셔여.
나는 아버지등에다 대고 너스레를 떨며 은근슬쩍 밥상 위의 풀죽 그릇에 눈길을 돌렸다. 얼마 되지도 않은 보리쌀을 퉁퉁 불려 나물과 함께 삶은, 푸르댕댕한 죽 한 그릇. 벌써부터 내 배에서도 꼬록, 꼬르륵하는소리가 우렁차게 나고 있었다. 이 죽 한 그릇이면 그래도 동생 둘을 먹일 수 있겠지. 이런 생각에 빠져 자꾸 눈길을 밥상 쪽으로 돌렸다.결국 나는 아버지가 한참거들떠보지도 않아 식어빠진 죽 그릇을 살포시 들어 올리며 말했다.
- 아침 일찍 동생들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한가득 나무를 해오느라 엄청 지쳤네여. 아부지, 당장 밥 생각 없으시믄 이거 배고픈 동생들이라도 멕일게여. 그래두 괜찮지여?
-......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냥 오냐, 한마디만 해주면 좋으련만자꾸 조바심 나게입을 꾹 다물고 뒷모습만 보이는 아버지. 나는 슬슬짜증이 밀려오고 답답한 마음에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그러고 있자니그냥기다리지말자 싶어, 두 손에 죽 그릇을 떠받치고 방문으로 향했다.그런데......
컴컴한 밤중에 한 맺힌 귀신이 무덤가를돌아다니며 내는으스스한 소리가 이런 소리일까. 그리 넓지도 않은 방 안에서 희한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흑흑. 아주 짧게 울리다 뚝하고 멈추는 소리. 거기에 맞춰 순간적으로 내 동작이 절로 뚝 멈췄다. 흐흐흑, 흐흑. 얼음처럼 몸이 굳어 차마 고갤 돌리지 못하고 두 눈동자만 옆으로 떼구르르 굴려아버지 쪽으로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아버지가 제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여전히 내게서 등을 돌리고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상체를 아래로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날 놀라게 한요상한 소리가 또 다시 들렸다. 그제야 난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길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 내 열두 살 생애에 들어본 것 중, 제일 이상한 울음소리.
아이 참, 이를 어째.아버지, 아버지가 안 먹고 내버려둔 죽 한 그릇, 그거 좀동생들이랑 나눠 먹겠다는데 이렇게 울 것까진 없잖아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