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동안 이 영화 헤어질 결심을 꽤 여러 번 n차 관람하면서 무한 루프에 빠진 듯 헤어 나오질 못했다.
처음 영화를 보면서 도통 알기 힘든 이 느낌이 무언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가 애매모호하고 명료하지 않았다. 김승옥 [무진기행]이 떠오르는 안개, 항상 안개가 자욱한 도시 '이포', 영화 전반에 걸쳐 나오는 OST '안개'라는 노래. 서로 낯선 나라 언어로 자신의 생각과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힘든 두 남녀.
보통은 '잘 몰라도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 하고 말할 수 있었다. 좋으면 그냥 좋은 점을, 싫으면 싫은 이유를 말하면 됐는데......
이토록 의구심이 풀리지 않아 머릿속에서 맴도는 영화, 그런데 자꾸 생각나는 영화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가입해서 보고 있는 OTT 콘텐츠 플랫폼에 [헤어질 결심]이 마침 올라 와 있었다. 다시 처음부터 뜯어보았다. 처음보다 집요하게, 영화 상 나오는 소품, 배우들이 입고 있는 의상, 장소의 배경 등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이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그랬듯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게 아니다싶은 상징성을 내포하는 공간과 소품 배치. 인물들의 시선 처리와 카메라 촬영 각도. 미장센에 공들인 영상 화면이 참 '박찬욱'스러웠다.강렬한 원색이면서도 쨍한 느낌이 아닌, 한 톤 낮춘 보색 대비 배경색의 공간과 소품 배치. 몇십 년 전에나 봤음직한 아버지, 어머니 세대 취향의 복고풍 레트로 패션.
해준의 갈색 정장과 서래의 청색 코트는 각각 산과 바다를 상징
주인공 형사 '해준'의 벙벙한 트렌치코트와 슈트핏. 경찰이라기엔 상대적으로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 마르고 연약해 보이는 체격. 우리가 흔히 수사물에서 봐 왔던 형사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거칠고 상스럽지 않아 도리어 젠틀하기까지 한 말투와 태도, 주변 물건을 정리 정돈하는 깔끔함, 사건 수사에 있어서 냉철하고 명석한 머리로 까다로운 사건을 해결해 가는 스마트함, 범인 검거 또한 집요하고 신속하기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남자, 해준.
난 어린 시절에 해외 수사 드라마 [형사 콜롬보]를 보면서 성장했었다. 대인관계가 낯설고 서툰 까다로운 남자, 결벽증과 강박증을 지니면서 동시에 날카롭고 뛰어난 추리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 '콜롬보'.
그와 함께 한국의 최장기 수사드라마 '수사반장'에 나오는 최불암 씨가 머릿속으로 연상되는 건 억지스러운 추측일까. 최근 '수사반장 1958'이라는 드라마가 새롭게 복고풍으로 리메이크되어 시청자들에게 선보인다는 홍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실제 저런 모습의 형사가 있을까 싶은데, 내 글을 읽고 있을 독자 분 중 저런 형사를 보셨다면 제보(?) 해 주시기를. 하하.
<< 지금부터 영화 내용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유의 바람 >>
담당 형사와 사건 피해자의 아내로 만난 두 남녀.
한국인 형사와 중국인 미망인의 대화는 참으로 어색한, 그러함에도 강렬한 부사 '마침내'로 묘하게 시작된다.
서래의 시선은 아래로, 해준의 시선은 서래를 향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자신을 한국말이 부족한 중국인이라고 소개하는 송서래.
아버지와 딸 사이로 오해받을 만큼 나이 많은 남편과 지금 막 남편을 잃은 미망인치곤 어쩐지 침착하고 담담한 태도의 아내.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첨부터 의뭉스럽고 특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해준과 후배 형사 수완은 서래의 말투와 독특한 어휘, 태도를 보며 용의자로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 헤어질 결심 각본 중 일부 ]
송서래의 알리바이를 조사하고, 죽은 기도수와 아내 서래의 아파트 앞에서 잠복근무를 시작하는 두 형사.
남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서래를 보면서, 후배 형사 수완은 무서운 여자라며 더욱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해준은 그런 수완에게 서래의 담담함을 대변하는 듯한 말을 한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뭐, 이 대사에서 이미 해준의 마음에 서래를 향한 관심과 호기심이 서서히 물드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건의 유일한 용의자로 의심받는 여자에게 연심을 품는다는 건 정말,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덫에 걸리는 것. 더군다나 해준과 같은 냉철하고 명석한 형사는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감정.
두 사람 시선은 형사와 용의자가 아니라 서로를 탐색하는 연인의 그것에 가깝다.
서래가 남편을 죽였다는 이렇다 할 단서나 알리바이가 없는 상태였다.
죽은 기도수의 손톱 밑에서 타인의 DNA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래를 경찰서로 호출하는 해준. 서래가 입고 있던 하의를 들추어 남편과 몸싸움을 하면서 기도수 손톱에 긁힌 허벅지 상처를 보여준다. 싸운 이유를 묻자 산에 같이 등반을 가자고 했는데 자신은 산이 싫어 가기 싫다 했더니 불 같이 화를 냈다 한다. 몸싸움을 할 정도로 산이 싫으냐 하니 서래는 대답한다.
"공자님 말씀에,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한다. 나는 바다가 좋습니다."
해준이 들릴 듯 말 듯, 나도,라고 은근슬쩍 말한다. 서래가 그 말을 설핏 듣는다.
처음 서래와 남편 기도수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던 것일까. 서래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하다가 알게 된 사실. 송서래는 중국에서 배를 타고 몰래 들어오려다 발각된 불법 입국자였고, 출입국 담당공무원이었던 기도수의 도움을 받아 추방되지 않고 한국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 서래의 외할아버지가 중국에서 조선 독립운동에 기여한 계봉석 장군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아 국가 유공훈장을 받고 한국에서 살 수 있게 도와준 인물이 남편 기도수였다. 그렇게 서래에게 은인이 되고 남편이 된 기도수. 은퇴 후 최근까지 민간 면접관으로 일했다.
기어이 위험한 절벽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기도수
기도수는 어떤 사람인가. 친구가 별로 없고 홀로 기어이 위험한 절벽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남자. 등반하는 자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자랑스럽게 유튜브에 올리는 남자. 그는 자기 과시와 정복욕 그리고 소유욕으로 똘똘 뭉친 나쁜 남자였다. 서래의 몸에 자신의 이니셜 'KDS'를 새기고 걸핏하면 손찌검을 하는 남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체 부위만 골라서 폭력을 행사하는 깔끔한 남자. 꽤 비싸고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모든 물건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기는 것처럼 서래 또한 이니셜을 새긴 물건 취급을 하며 폭력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인물.
해준의 상사는 빨리 기도수 사건을 마무리하고 질곡동 사건 같은, 굵직한 사건을 해결하라며 재촉한다. 한편 후배 형사 수완은 서래가 중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돌본 친어머니를 살해하고 도주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해준은 서래의 완벽한 알리바이와 혐의점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을 이미 마음속으로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수완이 제시한 혐의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중국 당국에서 보내온 송서래에 대한 살인혐의 수사 문건. 그 문건을 서래 휴대전화로 전송하며 문자 메시지로질문한다.
- 이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엔 물음표로 묻다가 곧 마침표로 고쳐 묻는다.)
- 내 집으로 와요.
어디 경찰을 오라 가라 하냐며 화를 내면서도 설레어하는 해준. 아내 정안에게 바쁜 일이 있다며 옷을 갈아입고 자동차 액셀을 급하게 밟고 곡예운전을 하며 서래 집으로 향한다. 평소 같으면 이포의 뿌연 안갯속을 헤치며 아내의 직장이 있는 이포 집과 부산을 오가는 운전 길이 위험하고 고단했었다. 하지만 서래 집으로 향하는 길은 이상하게 하나도 피곤하지 않고 되레 힘이 나는 해준. 아드레날린이 불끈 솟아나는 것 같다.
서래 아파트로 온 해준은 한껏 달뜬 표정으로 따지듯이 서래에게 묻는다. 이런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도 참고 살아온 이유가 뭐냐, 왜 이런 나쁜 남자와 결혼했느냐고. 서래는 대답한다.
"제 얘기를 듣고 울어준 단일한 한국 사람이에요."
밀입국하는 배 창고에서 짐승처럼 똥, 오줌과 함께 뒹굴던 서래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서래의 이야기를 유일하게 들어주고 울어준 사람이 죽은 남편, 기도수였다 한다. 그 처연했던 서래의 몰골을 상상하면 저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해준.
중국에서 죽은 친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은 채 침착하고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파도가 치는 바다가 연상되는 파란 벽지 문양
"어머니 본인이 스스로 죽기를 원하셨어요. 딸인 내가 그 일을 해주기를 바라셨고요. 처음엔 무시했지만 나중엔 원하시는 대로 해드렸어요. 펜타닐 4알이면 되죠. 나도 4알을 챙겼고요."
호기심과 동정심이 사랑으로 확 바뀌는 순간이다. 해준의 마음은 서래에게로 완전히 넘어가버린다.
딱히 서래에게서 남편을 죽인 정황이 포착되지 않았다. 특히 남편 사망 추정 시간, 월요일마다 집으로 방문하여 돌보는 할머니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CCTV 영상과 출근 확인 전화 등이 서래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준다. 마침 기도수 주변을 면밀하게 탐문하다가 면접관으로 일하는 직장으로 기도수의 부정 비리를 고발하는 편지가 여러 통 왔었다는 사실을 직장 동료를 통해 알게 된다. 또한 기도수 본인 필체로 쓰인 유서까지 발견되면서 사건은 피살에서 다시 자살로 전환된다.
결국 기도수의 죽음을 자살로 최종 마무리 짓는 해준. 언젠가부터 해준은 죽은 기도수가 즐겨 마시던 위스키를 플라스크에 담아 마시면서 기도수를 따라 하게 된다. 서래를 의식해서 하는 모방 행위인 듯하다.
어영부영 서둘러 자살사건으로 마무리하려는 해준이 못마땅한 수완, 평소 그 답지 않다며 살인사건 용의자 송서래를 똑바로 보라 충고하며 혼자 사라진다. 술에 잔뜩 취한 수완이 서래 집으로 가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전화를 받은 해준은 황급히 수완을 데리러 서래 집으로 가는데. 벌써 서래 집 거실은 깨진 조명과 물건들로 엉망이 되었다. 술 취해 소파에서 자고 있는 수완을 보며 민망한 표정으로 미안해한다. 서둘러 엉망이 된 집안을 치우고 청소를 하며 정리하는 해준.
챙겨 온 죽은 남편의 롤렉스 시계와 유품을 서래에게 직접 전달한다. 그리고 당신 남편의 사건은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 해준이 서래가 더 이상 용의자가 아님을 밝히자 서래가 이제 기쁘냐고 묻는다. 무어라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해준.
- 이제 우린.
- 우리가 뭐요?
반문하는 서래를 보다가 해준은 수줍은 듯 눈길을 피한다. 돌아서 허리에 권총이 달린 툴 벨트를 매며 서래를 향해 밥 먹었냐며 묻는다.
자신의 부산 자취집으로 초대하는 해준. 자신이 '단일하게' 할 수 있는 중국 요리, 볶음밥을 해서 서래와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해준 집 벽에 붙은 미해결 사건 관련 사진들 중 남편 사건과 관련된 사진들을 골라 태운다. 처음엔 당황스러워하다가 서래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해준. 이제부터 자신과 서래 사이에 더 이상 기도수의 죽음이 끼일 이유가 없다 생각한다. 미해결 사건 중 질곡동 살인사건 파일을 아무렇지 않게 뒤져보는 서래. 해준은 범인으로 지목한 홍산오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지적하는 서래의 말을 듣고 단서를 얻어 홍산오의 전 애인 오가인을 찾아간다.
오가인이 운영하는 미용실 부근에서 배회하고 있던 홍산오를 발견한 해준과 수완. 미용실 안에서 날카로운 가위 하나를 획득해서 도망치는 홍산오를 죽어라 쫓아가는 해준. 어느 집 막다른 옥상에서 대치하는 해준과 홍산오. 어떡해서든 산오를 회유하고 달래 보려고 말을 거는 해준은 뒤로 몰래 권총을 감추고 있다가 방심한 상대의 왼쪽 다리를 쏜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산오. 마지막 유언인양 말한다. 그리고 갖고 있던 가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생을 마감한다.
가인이한테...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 주세요.
막상 홍산오를 잡긴 했지만 산오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처절하고 충격적인 해준. 적지 않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은 해준은 오늘 밤도 쉬이 잠들지 못할 것 같다. 이포 집으로 오라는 아내 정인에겐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서래가 보고 싶어 진다. 아니나 다를까. 서래는 이런 해준의 마음을 읽은 듯이 곧장 해준의 집으로 간다.
반가운 마음에 얼굴 표정이 환해진 해준. 해준 씨를 재워주려고 왔다는 서래. 둘의 눈빛이 꽁냥, 꽁냥 하다.
만성 불면증을 앓는 해준이지만 서래만 있으면 아주 잘 잔다.
이후 이들은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본격적으로 눈을 맞추며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기 시작한다.
언어의 벽이 가로막혀 있어 정확한 소통을하지는 못한다. 하나 눈을 맞추며 표정을 읽다 보면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어떤지 전해지기에 충분하다. 이심전심.
주머니가 많이 달린 슈트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지는 서래를 보며, 해준은 이런 양복이 여러 벌 있다며 강조한다.